[94세로 타계한 밀턴 프리드먼 교수] '작은 정부' 외친 20세기 경제학 代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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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샌프란시스코에서 16일(현지시간) 심장병으로 별세한 밀턴 프리드먼 교수(94)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함께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꼽힌다. '현대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창시자'이자 '통화주의의 대부(代父)'로 불리고 있다.
20세기 초반이 케인스의 시대였다면 20세기 후반은 프리드먼의 시대였다.
그가 창시한 현대자유주의 시장경제론은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먼이 주창한 이론은 자유시장경제와 통화주의로 요약된다.
재정정책 등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줄이고 모든 경제활동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자유시장경제론의 골자다.
한마디로 정부는 작을수록 좋으며 시장은 놔둘수록 좋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아울러 "물가상승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통화)적 현상이다"는 유명한 말은 그가 제창한 통화주의를 함축한다.
그의 이론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계의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당시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일반화된 케인스 학파의 이론이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할 때.대공황의 원인을 수요부진으로 진단하고 재정정책과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며 일세를 풍미하던 케인스 학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의 주장은 석유파동 여파로 인플레이션 홍역을 겪으며 정부 개입의 한계가 드러난 1970년대 들어 케인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미국의 경우 닉슨,포드,레이건,부시 대통령 등 공화당 정부가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수립했다.
'철의 여인' 대처 전 영국 총리도 프리드먼의 이론에 영감을 받아 강력한 시장주의를 실천에 옮겼다. 1973년 칠레 피노체트 정부에 300%를 넘던 인플레를 잡기위해 급격한 통화감축 및 재정긴축을 자문했다가 오히려 대량 실업 및 부도를 초래,1976년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성난 칠레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일세를 풍미한 통화주의는 그만큼 거센 반론에 부닥치기도 했다.
프리드먼은 191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해인 1946년부터 30년 동안 시카고대 교수로 일했다.
이때 그의 이론을 신봉하는 젊은이들이 시카고대에 몰려와 이른바 '시카고 학파'가 만들어졌다.
90세가 넘어서도 제자들의 논문을 봐주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부인 로즈 여사와 아들 데이빗 역시 경제학자로 일가가 경제학자 집안을 이루고 있다.
임금과 가격을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는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와 대립각을 세우는 등 말년까지 지론을 굽히지 않아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자''작은 정부론의 기수''반(反) 케인스 학파의 창시자' 등의 별명이 따라 다닌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프리드먼 어록]
◆"자유 경제는 (정부 등) 특정한 그룹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준다"(1962년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인간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함께 작동한다는 사고가 미국에 위대한 결실을 가져다 줬다"(1980년 저서 '선택의 자유'에서)
◆"동·서독과 홍콩 및 중국의 차이를 가른 것은 다름아닌 자유시장과 사적재산인정 여부다"(1993년 워싱턴의 한 강연에서)
◆"일반적인 정책권고를 한다면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하며 경제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2002년 10월,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새 정부에 권고하는 말이라며)
◆"재정정책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결코 믿지 않는다"(2004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 약력과 주요저서 ]
△1912년 뉴욕 브루클린 출생
△1933년 시카고대 석사
△1946년 컬럼비아대 박사
△1946년~1976년 시카고대 교수
△1967년 전미경제학회장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77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교수
△1980년 레이건 대통령 경제정책 자문역
<주요 저서>
△화폐수량설 연구(1956)
△소비함수이론(1957)
△자본주의와 자유(1962)
△미국의 통화역사(1963)
△선택의 자유(1980)
20세기 초반이 케인스의 시대였다면 20세기 후반은 프리드먼의 시대였다.
그가 창시한 현대자유주의 시장경제론은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먼이 주창한 이론은 자유시장경제와 통화주의로 요약된다.
재정정책 등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줄이고 모든 경제활동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자유시장경제론의 골자다.
한마디로 정부는 작을수록 좋으며 시장은 놔둘수록 좋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아울러 "물가상승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통화)적 현상이다"는 유명한 말은 그가 제창한 통화주의를 함축한다.
그의 이론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계의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당시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일반화된 케인스 학파의 이론이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할 때.대공황의 원인을 수요부진으로 진단하고 재정정책과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며 일세를 풍미하던 케인스 학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의 주장은 석유파동 여파로 인플레이션 홍역을 겪으며 정부 개입의 한계가 드러난 1970년대 들어 케인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미국의 경우 닉슨,포드,레이건,부시 대통령 등 공화당 정부가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수립했다.
'철의 여인' 대처 전 영국 총리도 프리드먼의 이론에 영감을 받아 강력한 시장주의를 실천에 옮겼다. 1973년 칠레 피노체트 정부에 300%를 넘던 인플레를 잡기위해 급격한 통화감축 및 재정긴축을 자문했다가 오히려 대량 실업 및 부도를 초래,1976년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성난 칠레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일세를 풍미한 통화주의는 그만큼 거센 반론에 부닥치기도 했다.
프리드먼은 191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해인 1946년부터 30년 동안 시카고대 교수로 일했다.
이때 그의 이론을 신봉하는 젊은이들이 시카고대에 몰려와 이른바 '시카고 학파'가 만들어졌다.
90세가 넘어서도 제자들의 논문을 봐주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부인 로즈 여사와 아들 데이빗 역시 경제학자로 일가가 경제학자 집안을 이루고 있다.
임금과 가격을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는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와 대립각을 세우는 등 말년까지 지론을 굽히지 않아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자''작은 정부론의 기수''반(反) 케인스 학파의 창시자' 등의 별명이 따라 다닌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프리드먼 어록]
◆"자유 경제는 (정부 등) 특정한 그룹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준다"(1962년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인간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함께 작동한다는 사고가 미국에 위대한 결실을 가져다 줬다"(1980년 저서 '선택의 자유'에서)
◆"동·서독과 홍콩 및 중국의 차이를 가른 것은 다름아닌 자유시장과 사적재산인정 여부다"(1993년 워싱턴의 한 강연에서)
◆"일반적인 정책권고를 한다면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하며 경제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2002년 10월,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새 정부에 권고하는 말이라며)
◆"재정정책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결코 믿지 않는다"(2004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 약력과 주요저서 ]
△1912년 뉴욕 브루클린 출생
△1933년 시카고대 석사
△1946년 컬럼비아대 박사
△1946년~1976년 시카고대 교수
△1967년 전미경제학회장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77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교수
△1980년 레이건 대통령 경제정책 자문역
<주요 저서>
△화폐수량설 연구(1956)
△소비함수이론(1957)
△자본주의와 자유(1962)
△미국의 통화역사(1963)
△선택의 자유(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