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 소설가 >

가을 없이 겨울이다. 일조량이 와짝 줄었다. 하와이에 출장을 다녀온 동생은 인천공항을 나서는 순간 며칠 사이에 완연히 달라진 바람과 공기 냄새에 집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두 대를 그냥 떠나보냈다고 했다.

서울 떠날 때 입었던 가을 옷속으로 찬바람이 파고드는데 갑자기 사무치게 외롭더라고 했다. 뜨거운 태양과 관광객들,야자수와 레이를 목에 건 원주민 처녀들 틈에서 잠깐 잊었던 현실이 급작스레 차가워진 날씨와 함께 몰려든 것이다. 동생은 햇빛에 얼룩덜룩 그을린 손가락을 펼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날짜를 손꼽아보았다. 주변의 성화와 독촉에도 불구하고 올 한 해도 이렇듯 결혼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게 된 것이다.

내 주위에는'노처녀'로 불리는 여자들이 숱하다. 몇 살부터 노처녀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월에 따라 그 나잇대도 고무줄처럼 늘고 주는 모양이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친지들이 결혼하지 못한 사촌 언니를 두고 노심초사하던 것을 보았다. 그때 그 언니 나이는 스물일곱인가 여덟이었다. 그때 기준으로 보자면 내 주위의 노처녀들은 '노처녀'라는 말도 낯뜨거운,마흔을 넘겼거나 마흔이 내일모레인 처녀들이다.

노처녀,하면 노처녀 히스테리란 단어가 떠오른다. 중학교 때 물상 선생님은 서른을 코앞에 둔 분이었는데 결혼하라는 주변의 성화가 말도 못했던 모양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자신의 키보다 긴 몽둥이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몽둥이가 어찌나 긴지 창가 쪽에 선 채로도 복도 쪽 아이의 손바닥을 때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노처녀 히스테리 못지 않은 것이 임신 히스테리였다. 임신한 내내 미술선생님은 임신의 힘겨움과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짜증으로 풀어냈다. 아기를 낳자 선생님은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은 아이도 나무라지 않는 너무도 너그러운 분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복도에 질질 끌리는 물상 선생님의 몽둥이 소리에 몸서리쳐 했는데 졸업을 하고 한참 뒤에 물상 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언제 그랬냐 싶게 상냥한 선생님이 되었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어쩌다 혼기를 놓친 것일까 싶게 내 주위의 노처녀들은 책임감도 뛰어날 뿐 아니라 성실하다. 일단 한 직장에서 10년 이상 근속한 것만 봐서도 알 수 있다. 최소한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가는 아이 밥 굶기지는 않을 테고 누운 채로 비몽사몽 출근하는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진 않을 사람들이다.

"눈이 여기 달린 거 아냐?"눈 있을 자리를 이마에 찍으면서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결혼한 여자들이다. 그 말에 노처녀들은 발끈한다. "눈이 높은 게 아니라 눈이 맞는 남자가 없었어."

비혼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꼽으라면 "결혼해봐야 사람 돼"라거나"자식을 낳아봐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야"라는 말이다. 비혼만큼이나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은 일에 곱지 않은 눈총을 보낸다. 왜 애를 낳지 않느냐고 하도 꼬치꼬치 캐물어 당황했다는 이도 있다. 애는 낳지 않으면서 애완견을 기른다고 하면 고개까지 설레설레 흔들면서 책임감 운운하려 든다.

비혼인 내 친구는 결혼한 친구들과의 모임을 꺼린다. 말끝마다 남편과 시댁,아이 이야기뿐인데 어찌 들으면 그것이 큰 유세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헤어질 땐 "절대 넌 결혼 같은 거 하지 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한 선배의 시상식 자리에서 또 다른 선배가 덕담을 건넸다. 말끝에 이제 결혼해 아이도 낳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보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이 웃었다. 선배는 오십이 다 되어서까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동생은 이 쓸쓸함을 보라색 블라우스 사는 것으로 풀었다.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올 한 해 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보라색 블라우스로 멋을 낸 동생이 웃는다. "딱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거야."

이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 사회가 할 일은 나날이 늘어나는 비혼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사회보장법을 다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