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스라는 학자는 국제화되지 않은 통화를 사용하는 국가는 외환위기를 한 번쯤 당할 수밖에 없는 원죄(original sin)가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당한 가장 근본적 요인은 원화가 국제화되지 못한 데에 따른 원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원화를 발행하여 우리끼리 쓰면서도 항상 달러로 대표되는 대외결제용 통화를 충분히 따로 챙겨놓아야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잘못해서 달러가 부족해지면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운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1996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적자는 역사상 최고인 231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적자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당시 총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5574억달러였으니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GDP대비 4.1%를 기록했다. 이 규모가 4%를 넘으면 위험하다는 지적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은 지금 어떤가. 수지적자가 약 8000억달러,총 GDP가 약 12조5000억달러이니 수지적자의 GDP 대비 비율이 6.4%로서 4%를 훌쩍 넘어있다. 그러나 미국경제의 외환위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발행해 사용하는 달러가 곧 전 세계인이 사용하는 외환이기 때문이다. 국내통화가 곧 국제통화인 이 거대한 축복(?)은 그러나 그냥 주어진 구도는 아니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연합군 승리가 굳어져가던 즈음 연합국의 대표들이 미국 뉴햄프셔주의 조그만 도시 브레튼우스에 모여들었다. 전후의 국제금융질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모임에서 탄생한 제도가 바로 브레튼우스 시스템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를 전 세계가 국제결제통화,곧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은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기 위해 달러를 금으로 언제든지 바꿔주겠다는 금태환보장조건을 제시하였다. 이미 미국은 2차대전 중에 전쟁에 필요한 무기 및 각종 군수물자의 생산을 도맡아 하면서 엄청난 금을 챙겼다. 미국을 괴롭히던 대공황의 그림자는 이미 눈녹듯 사라졌고 2차대전이 끝날 즈음 전 세계 금 보유량의 약 3분의 2 정도가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다. 이런 미국이 달러와 금의 교환비율을 35달러 대 1온스(금 1온스는 31.1그램)로 정했을 때 모든 국가들은 달러의 기축통화지위를 인정하였다. 달러와 기타통화 간에는 금과의 교환비율을 근거로 고정환율제가 적용되었다. 또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기관으로서 국제통화기금(IMF)과 개발기관으로서의 세계은행(IBRD)도 설립되었다. 미국은 결국 물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거머쥔 최고의 수퍼 파워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브레튼우스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내재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미국 경제가 만족시켜야 할 조건에 모순성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첫째,달러에 대한 신뢰가 유지되려면 미국경제에 있어서 물가안정,경제성장,'경상수지균형' 등의 조건이 달성되어야 한다. 둘째,전 세계 교역량이 증가할 경우 달러 수요가 늘어나므로 공급도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달러가 세계경제시스템으로 풀려나가려면 궁극적으로 미국경제가 '경상수지적자'를 기록해야만 한다. 첫째조건(신뢰조건)과 둘째 조건(공급조건)을 비교해보면 금방 모순점이 발견된다. 신뢰조건은 수지균형을 요구하는데 공급조건은 수지적자를 요구하고 있다. 유동성 딜레마라고 명명되는 이러한 내재적 모순점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출범한 셈이다.

결국 이 시스템은 한차례 위기를 맞는다. 바로 베트남전 때문이었다. 10여년 이상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전비지출로 인해 달러는 남발이 되었다. 공급이 남발되는 통화를 신뢰할 국가는 없다. 결국 대량의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유지하던 국가들이 달러를 팔고 금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금 가격의 폭등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약속대로라면 미국은 당연히 보유하던 금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금의 대량유출을 우려한 닉슨 정부는 결국 1971년 8월15일 '금 안바꿔줌 선언',곧 금태환정지선언을 통해 자신이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철회해버렸다.

'판'을 짜더니 세가 불리해지자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주도권(헤게모니)을 쥔 국가는 그래서 두렵다. 힘을 자제하는 듯 하다가도 필요할 경우 노골적으로 힘을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판'을 짤 능력이 안 되는 국가는 이를 인정하고 적응하되 자신에게 불리하게 '판'이 짜이지 않도록 평소에 노력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금태환보장조건이 깨지고 환율제도가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바뀌었지만 마르크나 엔의 보조적인 역할을 전제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달러는 신뢰조건과 공급조건의 두 가지 모순된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최근 미국은 막대한 경상수지적자를 자본수지흑자로 메우고 있다. 하지만 지속적 경상수지적자는 통화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킨다. 신뢰조건에 또 금이 가고 있다. 글로벌 임밸런스로 대표되는 위기의 뒤에는 달러에 대한 신뢰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판'을 짜는 주체가 어떤 식으로 새 '판'을 짤지 기존의 '판'을 엎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하는 걱정이 앞서는 때이다.

/서울시립대 교수 chyun@uo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