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권위파괴의 後過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洪準亨 < 서울대 교수·공법학 >
지금 한국은 권위파괴 중이다. 어디 더 이상 파괴될 것이 남았느냐 반문하겠지만,파괴의 기운은 끈질기다. 원조(元祖)는 검사와의 대화 등으로 탈권위의 횃불을 쳐든 대통령이었지만,국회의원들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가 누구든 국회에 온종일 도열시켜 벌세우고 때론 망신을 주며 경쟁하듯 권위파괴의 야단법석을 벌였다.
그 와중에 권위파괴의 불길이 급기야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사법기관과 그 책임자들에게까지 덮쳤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를 둘러싼 위헌 논란은 재연돼 악화될 조짐이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 역시 사법개혁의 전도사 역을 맡아 용왕매진(勇往邁進)하다 검찰의 반발과 변호사들의 원성을 사며 논란에 휩쓸리고 말았다. 법원과 검찰이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미국계 펀드 론스타 경영진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여부를 놓고 감정싸움을 벌이며 옥신각신하는 가운데,국정원의 간첩사건 수사로 불거진 정부 안팎의 마찰음도 쉬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에서는 특히 여권의 정계개편론을 둘러싸고 '떴다방 정치'니 하는 막말과 온갖 의혹들이 난무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앞길이 어지러운데,누구에게 길을 물을지 막연하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원로들은 어디에 있는가.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원로들은 물론 교육계나 문화계,심지어는 종교계의 원로들마저도 각자 패로 갈려 울근불근하고 있을 뿐이다. 내년 대선까지 1년인데,벌써 이 정도로 혼미하니 내우외환으로 나라가 망할까 걱정하는 필부(匹夫)의 기우조차 예사로 넘길 수 없다.
기성의 권위구조가 쇠락하고 새로운 권위가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관측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목도하는 권위의 변동은 매우 급격하고 다분히 인위적으로 기획된 개혁작업의 결과란 인상을 준다. '○○개혁'이란 이름 아래 사회 전반에 걸쳐 동시다발 또는 각개약진 식으로 진행된 운동들 대부분이 기존의 권위구조를 타파하는 데 목표를 뒀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다. 물론 개혁과정에서 기존 권위들이 손상을 입는 건 불가피한 일일 수 있다. 불의와 억압의 사회구조를 뜯어고쳐 정직한 사람들이 우대받는 사회를 만들겠노라 다짐한 개혁가의 눈에는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는 것 이상 절박한 과제도 없었을 것이다.
강남불패 신화로 상징되는 부동산 문제의 척결,서울대학교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사회의 해체,재벌문제의 해결과 지역주의 타파,검찰과 사법의 개혁 등이 국정과제로 지목된 것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모택동식 문화혁명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들 기득권 집단들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해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개혁정치의 최우선 순위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위파괴만으로 사회는 발전하지 않는다. 탈권위의 실천은 감동적이고 화려한 잔상(殘像)을 남겼지만,정작 남은 것은 새로운,제대로 된 민주적 권위가 아니라 탈권위 자체의 의미마저 탈색시켜 버린 황폐한 몰(沒)권위의 혼란이었다.
모든 형태의 권위구조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개혁이란 이름을 앞세웠다 하더라도 권위파괴는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정작 요긴한,약이 되는 권위들조차 마구 도매금으로 파괴해버릴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파탄적인 해체적 징후들 뿐이다.
지금은 탈권위의 미학을 읊조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정말 이 엄청난 기적을 이뤄냈던 대한민국의 권위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추스를 때다. 안타까운 건 개혁과정에 수반된 권위의 파괴는 좋은 것,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한번 파괴된 권위는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왔던 길을 되짚어 반성할 능력이 있다면,'○불''절대불가' 등의 팻말을 붙여 설정했던 금역(禁域)들이 과연 사회발전의 역동적 에너지를,지속능력도 없이 억압만 하지 않았는지,무책임하게 대안 없이 권위 파괴에만 몰두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탈권위란 미명하에 저질러진 권위파괴가 결국 누구를 도왔는지 냉철하게 반성할 시점이다.
지금 한국은 권위파괴 중이다. 어디 더 이상 파괴될 것이 남았느냐 반문하겠지만,파괴의 기운은 끈질기다. 원조(元祖)는 검사와의 대화 등으로 탈권위의 횃불을 쳐든 대통령이었지만,국회의원들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가 누구든 국회에 온종일 도열시켜 벌세우고 때론 망신을 주며 경쟁하듯 권위파괴의 야단법석을 벌였다.
그 와중에 권위파괴의 불길이 급기야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사법기관과 그 책임자들에게까지 덮쳤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를 둘러싼 위헌 논란은 재연돼 악화될 조짐이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 역시 사법개혁의 전도사 역을 맡아 용왕매진(勇往邁進)하다 검찰의 반발과 변호사들의 원성을 사며 논란에 휩쓸리고 말았다. 법원과 검찰이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미국계 펀드 론스타 경영진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여부를 놓고 감정싸움을 벌이며 옥신각신하는 가운데,국정원의 간첩사건 수사로 불거진 정부 안팎의 마찰음도 쉬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에서는 특히 여권의 정계개편론을 둘러싸고 '떴다방 정치'니 하는 막말과 온갖 의혹들이 난무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앞길이 어지러운데,누구에게 길을 물을지 막연하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원로들은 어디에 있는가.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원로들은 물론 교육계나 문화계,심지어는 종교계의 원로들마저도 각자 패로 갈려 울근불근하고 있을 뿐이다. 내년 대선까지 1년인데,벌써 이 정도로 혼미하니 내우외환으로 나라가 망할까 걱정하는 필부(匹夫)의 기우조차 예사로 넘길 수 없다.
기성의 권위구조가 쇠락하고 새로운 권위가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관측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목도하는 권위의 변동은 매우 급격하고 다분히 인위적으로 기획된 개혁작업의 결과란 인상을 준다. '○○개혁'이란 이름 아래 사회 전반에 걸쳐 동시다발 또는 각개약진 식으로 진행된 운동들 대부분이 기존의 권위구조를 타파하는 데 목표를 뒀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다. 물론 개혁과정에서 기존 권위들이 손상을 입는 건 불가피한 일일 수 있다. 불의와 억압의 사회구조를 뜯어고쳐 정직한 사람들이 우대받는 사회를 만들겠노라 다짐한 개혁가의 눈에는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는 것 이상 절박한 과제도 없었을 것이다.
강남불패 신화로 상징되는 부동산 문제의 척결,서울대학교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사회의 해체,재벌문제의 해결과 지역주의 타파,검찰과 사법의 개혁 등이 국정과제로 지목된 것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모택동식 문화혁명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들 기득권 집단들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해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개혁정치의 최우선 순위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위파괴만으로 사회는 발전하지 않는다. 탈권위의 실천은 감동적이고 화려한 잔상(殘像)을 남겼지만,정작 남은 것은 새로운,제대로 된 민주적 권위가 아니라 탈권위 자체의 의미마저 탈색시켜 버린 황폐한 몰(沒)권위의 혼란이었다.
모든 형태의 권위구조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개혁이란 이름을 앞세웠다 하더라도 권위파괴는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정작 요긴한,약이 되는 권위들조차 마구 도매금으로 파괴해버릴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파탄적인 해체적 징후들 뿐이다.
지금은 탈권위의 미학을 읊조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정말 이 엄청난 기적을 이뤄냈던 대한민국의 권위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추스를 때다. 안타까운 건 개혁과정에 수반된 권위의 파괴는 좋은 것,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한번 파괴된 권위는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왔던 길을 되짚어 반성할 능력이 있다면,'○불''절대불가' 등의 팻말을 붙여 설정했던 금역(禁域)들이 과연 사회발전의 역동적 에너지를,지속능력도 없이 억압만 하지 않았는지,무책임하게 대안 없이 권위 파괴에만 몰두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탈권위란 미명하에 저질러진 권위파괴가 결국 누구를 도왔는지 냉철하게 반성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