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느낌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출자총액제한 제도(출총제) 폐지에 따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10차례에 걸쳐 개최한 '시장경제 선진화' 태스크포스(TF)에 참여했던 재계 관계자가 토로한 답답함이다.

환상형 순환출자 금지가 세계적으로 사례가 없다는 점,해외 유수 기업들도 환상형 순환출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수없이 설명했는 데도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오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정위가 이처럼 순환출자 규제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정부와 재계 관계자들은 교수 출신 공정위 위원장들의 현실 감각 부족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다.

전임 강철규 위원장은 물론이고 권오승 위원장 역시 자신들이 설정해놓은 '재벌=거대악'이라는 도그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

권 위원장이 한국의 대기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지난 3일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특강에서 잘 나타난다.

권 위원장은 "재벌 총수 일가가 갖고 있는 지분은 5%밖에 안되는데 계열사 지분 44%로 그룹마다 40~50개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며 "소수의 재벌이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재벌은 더 이상 개인 소유주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담합이나 불공정거래에 대한 제재는 달게 받겠다.

하지만 개별기업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구조 자체를 '개선돼야 할 대상'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가운데 3분의 1이 가족이 지배하거나,창업자 가족이 경영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법학자 출신인 권 위원장이 아는지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순환출자 규제에 대한 공정위의 집착은 정부부처의 전형적인 '밥그릇' 챙기기에 다름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권 위원장이 취임 초기부터 지금처럼 재벌 규제를 강조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5월 있었던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강 위원장은 "과거 공정위는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와 투명성을 강조했지만,나는 그런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고 개별시장의 독과점 해소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업들에 지주회사 전환을 권유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발언은 전임 강철규 위원장과 대비되면서 '공정위의 정책중심이 재벌정책에서 경쟁 촉진쪽으로 옮겨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낳았다.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은 5개월여 만에 틀린 것으로 판명나고 말았다.

이와 관련,재계에서는 물론이고 정부 내부에서조차 '권 위원장이 5개월여 만에 공정위 관료들의 논리에 함몰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재벌구조 개선이라는 이슈를 놓을 경우 경제력 집중 억제 등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경쟁정책본부가 날아가게 돼 공정위 입장에서 소유구조와 관련된 헤게모니를 절대 놓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재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산자부와 재경부 등이 "지금의 출총제보다 강도가 더 센 규제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순환출자 금지를 강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