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덕 < 생활경제부 차장 >

3년 전 연수를 떠난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다. 처음 현지에 정착할 때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장만해 나갔다. 1년 동안 살다가 돌아가기 때문에 '비싼 것은 절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가족들과 중고품점(thrifty shop)을 훑고 다니면서 하나둘씩 가재도구를 사들였다. 싼 값에 적당한 물건을 구했다. "중고도 미제(美製)는 역시 좋아…"하면서.

그러나 우리 가족의 '중고품 사냥'이 성급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 최대 할인점인 월마트에 가보니 우리가 사들인 것보다 훨씬 싼 '새것'이 천지였다. 예컨대 120달러를 주고 중고 식탁을 샀는데,월마트에는 100달러짜리 새 식탁이 버젓이 팔리고 있었다. 물론 중국산이었지만.

미국에서 월마트가 소비자의 지갑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된 지는 오래됐다. 월마트의 위세는 '디플레이션 수출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중국이 싼 제품을 공급해 준 덕분이었다. 월마트를 한 국가로 치면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다섯 번째 거대 수입상에 등재된다고 한다. 뒤집으면 '메이드 인 차이나'가 월마트의 엔진인 셈이다.

얼마 전 월마트코리아와 한국까르푸를 인수한 국내 업체들이 간판을 바꿔달았더니 매출이 쑥쑥 올랐다는 보도자료를 내놨다. 그러나 그곳에 진열돼 있는 중·저가 생필품 코너에는 변함없이 중국산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 한국의 대형 마트들도 월마트처럼 중국산을 매개로 '디플레이션'을 '디스트리뷰트(유통)'하는 전위대가 돼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저임과 자본이 결탁해 전 세계에 디플레이션을 수출하는 나라,더군다나 이웃이어서 큰 도움이 되는 나라,우리는 중국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산 수입품이 '요변'을 부리기 시작했다. 올 들어 7월 말까지 중국산 주요 수입품의 가격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평균 15% 올라 의류 식자재 생활용품 등 생필품을 중국산 저가품에 의존해 온 국내 경제에 '중국발 인플레'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 (한경 10월18일자 A1,3면 참조)

중국산 수입품이 가파르게 오르는 이유는 중국 국내 사정 탓이 크다. 중국 정부의 과열 경기 억제조치와 위안화 가치 절상,이에 따른 중국 내 생산 원가 상승 등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를 두고 '유통시장에서 동북공정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내부용이지만 효과는 외부에 더 많이 미치는 게 흡사해서다. 그리 과장된 논리도 아닌 듯 싶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한·중경제의 상관관계를 볼 때 그렇다.

중국발 물가불안은 그동안 불황 속에서도 서민경제를 지켜온 물가안정이라는 안전띠가 풀어지면서 경제 전반에 크나큰 주름살을 지울 수 있다. 중국이 고구려사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은 '과거 '가 무대지만, 유통시장의 동북공정은 '오늘'의 문제다. 중국발 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해 긍정적인 시나리오도 없지는 않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가급등이라는 활화산을 안고 있는 '차이나 리스크'는 우리 경제에 북한핵보다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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