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은 코닝(Cornimg)사의 창립 150주년이었다.

축하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고 수많은 불꽃들이 코닝시의 밤을 수놓았다.

하지만 불과 몇달 뒤 상황은 돌변했다.

1996년부터 1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 육성해온 광섬유 사업이 IT(정보기술) 버블 붕괴로 막대한 손실을 안긴 것.무려 30억달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한때 113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월가의 투매가 이어지면서 1달러10센트까지 폭락했다.

미국 통신산업의 붕괴는 코닝 임직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다 주었다.

세계 최고의 유리회사로서 일찍이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 같은 위대한 발명가들과 미국의 첨단 비즈니스를 일구었던 명문기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 놓인 것이다.

코닝은 1996년 경영일선에서 은퇴했던 창업주의 5대손인 제임스 호튼을 불러들였다.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행하려면 회사 안팎에 두터운 신망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을 필요로 했는데,제임스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코닝(미국 뉴욕주)=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촌부의 복귀

제임스는 복귀하자마자 '살기 위해 팔을 자른다'는 일성을 토하며 엄청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기존 경영진들을 대부분 물갈이하고 전 직원의 절반인 2만5000명을 내보냈다.

또 전 세계 12개 공장을 폐쇄했다.

회사는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월가도 그에게는 남다른 신뢰를 보였다.

코닝의 폴 로고스키 국제담당 홍보총괄 이사는 "제임스 호튼 회장이 임직원들과 투자자들에게 쌓아놓았던 신뢰가 없었더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회장은 은퇴 후에도 코닝 지역사회에 끈끈한 연결고리를 유지했으며 경영복귀 요청을 받았을 때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창업.포기한 회사를 되찾다

코닝의 창업자는 영국계 이민자의 후손인 에모리 호튼 시니어. 무역과 부동산 등으로 돈을 번 사람이었다. 부를 축적한 호튼 시니어는 1851년 메사추세츠 서머빌의 소형 유리회사 게일&필립스가 매물로 나오자 과감히 유리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근거지를 코닝시로 옮겨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1860년대에서 1870년대로 유리회사 난립은 새롭게 출발하는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켰다. 결국 창업자인 에모리 시니어는 사업을 시작한 지 18년 만에 두 손을 들게 된다. 회사는 채권자에 넘어갔다. 하지만 채권자는 자신을 대신해 경영을 해줄 인물로 호튼가의 장남인 에모리 주니어를 선택했다. 에모리 주니어는 회사 정상화 노력과 함께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마침내 1872년 5월 에모리 주니어는 모든 부채를 상환한 뒤 회사를 호튼가의 품으로 다시 안았다.

○R&D를 트레이드 마크로

1909년 코닝을 성장궤도에 올려놓은 에모리 호튼 주니어가 죽자 그의 장남인 앨런슨 B 호튼이 뒤를 이었다.

이 시점에 앨런슨의 고민을 해결해주면서 훗날 코닝 R&D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유진 설리번 박사다.

1913년 설리반 박사는 4층 높이에 연면적 1700평 규모의 최첨단 화학 실험실을 설립했다.

이때 만들어진 중앙집중식 R&D(연구개발)센터는 아직까지도 코닝의 핵심 연구시스템으로 자리잡고 있다.

설리반 박사가 개발한 코닝의 제품은 1912년에 나온 '파이렉스'다.

○TV시대의 총아

4세대 경영자라고 할 수 있는 앨런슨의 아들 에모리 호튼은 TV시대를 주름잡은 경영자다.

이 시기 코닝은 TV부문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47년 미 연방통신협회가 방송기준을 만들자 코닝 경영진은 TV용 유리제품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미래 수요를 겨냥해 신기술을 적용한 TV유리제품을 생산하던 코닝은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 고전하게 된다.

당시 미국 최대 전자회사인 RCA가 자체 유리회사를 만들어 주문을 대폭 줄여버린 것.코닝은 과거 위기 때마다 겪었던 새로운 공정에 도전해 성공을 거뒀다.

젊은 과학자 제임스 기펜이 노동력을 대폭 줄인 신공정을 개발,경쟁 업체들을 압도해버린 것.1947년 20만대 수준이던 미국의 TV 보급대수는 1950년에는 1000만대로 폭증했고 코닝은 고스란히 그 수혜를 누렸다.

○10년을 노린 승부수

1957년이 밝자 5세대 경영자인 에모리 호튼 주니어가 코닝의 이사로 임명돼 경영 일선에 나선다.

R&D에 대한 투자는 1970년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저손실 광섬유'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개가로 연결됐다.

당시 경쟁사들은 "광 섬유기술은 2000년에나 상용화될 수 있는 너무 이른 기술"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대박은 10년이 지나지 않아 터졌다.

특히 1982년에 미 법무부가 반독점금지법에 따라 AT&T에 내린 분할 결정은 코닝에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2위 장거리통신 업체인 MCI는 AT&T의 분할을 계기로 그동안 보류해왔던 마이크로웨이브를 광섬유로 바꾸는 결정을 하고 코닝에 대규모 주문을 냈다.

코닝의 재도약과 동시에 경영권도 에모리 주니어의 동생 제임스로 넘어왔다.

제임스는 1962년 하버드 MBA를 나온 이후 줄곧 코닝의 재무,경영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만큼 누구보다 회사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학 분야에서의 비약적 성장으로 코닝은 1990년대 들어 강력한 재무구조를 갖추게 된다.

1990년 코닝의 연간 매출은 30억달러,주당 ROE(자기자본이익율)는 16.3%로 1983년의 두 배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