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일류 기업의 '오너십' 리포트] (3) BMW‥오너 결단으로 황금시대 개막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국 수입차 시장에서 BMW의 판매대수가 렉서스에 밀린다고요? 1등 브랜드인 BMW와 2위는 안 어울리는데…."'4기통 엔진'을 형상화한 것으로 유명한 BMW 독일 뮌헨 본사에서 만난 미하일 레브스톡 대변인은 "한국에서 BMW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기자의 인사말을 이렇게 되받았다.
웃으며 말했지만,그는 꽤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함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의 양대 산맥인 BMW에 대한 독일인,특히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 바바리아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들에게 BMW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세계 최고 브랜드이자 90년을 동고동락해온 가족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때 벤츠에 흡수돼 사라질 뻔했던 BMW가 프리미엄 자동차의 최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든다'는 바바리아인들의 자부심과 장인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뮌헨(독일)=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항공기 엔진 제조로 시작
BMW의 시작은 19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구스타브 오토와 1913년 칼 라프가 각각 설립한 항공기 엔진 제작업체가 합치면서 태어난 것.그러나 창업자인 오토는 극심한 우울증 탓에 회사를 떠나고,라프 역시 다른 경영진과의 마찰로 곧 BMW를 등지게 된다.
이들을 이어 경영권을 거머쥔 프란츠 요제프 포프와 카밀로 카스티글리오니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정부에 항공기 엔진을 납품하며 기업규모를 불려나갔다.
1923년에는 모터사이클 제조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포프와 카스티글리오니는 BMW를 자동차 메이커로 키우고 싶어했다.
기회는 1928년에 찾아왔다.
영국에 라이선스 비용을 내고 '오스틴 세븐'이란 모델을 만들던 '딕시 베르케'란 자동차 업체가 매물로 나온 것.딕시 베르케를 인수하며 자동차업계에 뛰어든 BMW는 다양한 차종을 잇달아 선보이며 성장가도를 달린다.
'독일이 부강해지기 위해선 자동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믿은 히틀러의 정책도 BMW의 성장에 한몫 했다.
◆권력에 휘둘린 경영
전쟁광 히틀러는 1930년대엔 BMW의 성장동력이 됐지만,1940년대 들어선 BMW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됐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류 항공기 제조업체'가 필요했던 히틀러에게 '2등 자동차 메이커'는 필요 없었던 것.
히틀러는 BMW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항공기 엔진 생산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고,뮌헨공장은 항공기 엔진 및 부품 공장으로 바뀌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BMW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뮌헨공장은 전쟁 여파로 산산이 부서졌다.
1948년 부도 위기에 몰린 BMW는 은행의 도움으로 일단 회생의 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폭스바겐이 '비틀'로 전후 독일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동안 BMW는 이렇다 할 히트작 하나 내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갔다.
결국 1959년 또다시 도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기업경영이 권력에 맹목적으로 휘둘릴 경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콴트가(家)의 등장,부활을 이끌다
무너져가던 BMW는 재력 있는 콴트가가 새로운 주인으로 나서면서 '제2창업'에 들어간다.
헤르베르트 콴트는 1960년대 들어 중산층이 빠르게 불어나는 점을 간파하고 "중산층을 타깃으로 하는 중형 세단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2년 뒤 선보인 '1500' 모델은 다이내믹한 성능과 비교적 적당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다.
항공기 오토바이 자동차 등 기계산업의 풀라인업에서 축적된 기술력도 빛을 발했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BMW는 승승장구했고,1963년에는 20년 만에 배당까지 하게 된다.
이 여세를 몰아 1500의 후속 모델인 '1600'과 변형 모델들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차츰 프리미엄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0~1980년대는 BMW에 '황금의 시대'였다.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이 회장으로 선임되던 1970년 17억달러 수준이던 판매수익은 10년 만인 1980년 40억달러로 뛰었다.
BMW는 1990년대 세계적인 M&A(인수·합병) 바람이 불 때 영국의 로버를 덜컥 인수했다가 큰 낭패를 겪었지만 손실을 각오한 콴트가의 과감한 재매각 결정으로 경영부실 요인을 제거했다.
악몽과도 같은 로버였지만,그 속엔 진주도 숨어 있었다.
BMW가 로버를 매각하면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브랜드인 '미니'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작 로버는 '미니는 죽은 브랜드'라며 관리하지 않았지만 BMW의 생각은 달랐다.
2001년 BMW가 개발한 '뉴 미니'가 출시되자 전 세계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한때 '죽었던' 브랜드였던 미니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20만대가 팔리며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로버 매각과 미니의 부활로 BMW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BMW 미니 롤스로이스 3각 편대의 판매대수는 2002년 105만대,2003년 110만대,2004년 120만대,2005년 132만대 등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BMW그룹은 올 들어서도 3분기 만에 100만대 판매를 돌파하며 사상 최대 판매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웃으며 말했지만,그는 꽤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함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의 양대 산맥인 BMW에 대한 독일인,특히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 바바리아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들에게 BMW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세계 최고 브랜드이자 90년을 동고동락해온 가족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때 벤츠에 흡수돼 사라질 뻔했던 BMW가 프리미엄 자동차의 최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든다'는 바바리아인들의 자부심과 장인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뮌헨(독일)=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항공기 엔진 제조로 시작
BMW의 시작은 19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구스타브 오토와 1913년 칼 라프가 각각 설립한 항공기 엔진 제작업체가 합치면서 태어난 것.그러나 창업자인 오토는 극심한 우울증 탓에 회사를 떠나고,라프 역시 다른 경영진과의 마찰로 곧 BMW를 등지게 된다.
이들을 이어 경영권을 거머쥔 프란츠 요제프 포프와 카밀로 카스티글리오니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정부에 항공기 엔진을 납품하며 기업규모를 불려나갔다.
1923년에는 모터사이클 제조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포프와 카스티글리오니는 BMW를 자동차 메이커로 키우고 싶어했다.
기회는 1928년에 찾아왔다.
영국에 라이선스 비용을 내고 '오스틴 세븐'이란 모델을 만들던 '딕시 베르케'란 자동차 업체가 매물로 나온 것.딕시 베르케를 인수하며 자동차업계에 뛰어든 BMW는 다양한 차종을 잇달아 선보이며 성장가도를 달린다.
'독일이 부강해지기 위해선 자동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믿은 히틀러의 정책도 BMW의 성장에 한몫 했다.
◆권력에 휘둘린 경영
전쟁광 히틀러는 1930년대엔 BMW의 성장동력이 됐지만,1940년대 들어선 BMW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됐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류 항공기 제조업체'가 필요했던 히틀러에게 '2등 자동차 메이커'는 필요 없었던 것.
히틀러는 BMW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항공기 엔진 생산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고,뮌헨공장은 항공기 엔진 및 부품 공장으로 바뀌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BMW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뮌헨공장은 전쟁 여파로 산산이 부서졌다.
1948년 부도 위기에 몰린 BMW는 은행의 도움으로 일단 회생의 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폭스바겐이 '비틀'로 전후 독일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동안 BMW는 이렇다 할 히트작 하나 내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갔다.
결국 1959년 또다시 도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기업경영이 권력에 맹목적으로 휘둘릴 경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콴트가(家)의 등장,부활을 이끌다
무너져가던 BMW는 재력 있는 콴트가가 새로운 주인으로 나서면서 '제2창업'에 들어간다.
헤르베르트 콴트는 1960년대 들어 중산층이 빠르게 불어나는 점을 간파하고 "중산층을 타깃으로 하는 중형 세단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2년 뒤 선보인 '1500' 모델은 다이내믹한 성능과 비교적 적당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다.
항공기 오토바이 자동차 등 기계산업의 풀라인업에서 축적된 기술력도 빛을 발했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BMW는 승승장구했고,1963년에는 20년 만에 배당까지 하게 된다.
이 여세를 몰아 1500의 후속 모델인 '1600'과 변형 모델들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차츰 프리미엄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0~1980년대는 BMW에 '황금의 시대'였다.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이 회장으로 선임되던 1970년 17억달러 수준이던 판매수익은 10년 만인 1980년 40억달러로 뛰었다.
BMW는 1990년대 세계적인 M&A(인수·합병) 바람이 불 때 영국의 로버를 덜컥 인수했다가 큰 낭패를 겪었지만 손실을 각오한 콴트가의 과감한 재매각 결정으로 경영부실 요인을 제거했다.
악몽과도 같은 로버였지만,그 속엔 진주도 숨어 있었다.
BMW가 로버를 매각하면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브랜드인 '미니'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작 로버는 '미니는 죽은 브랜드'라며 관리하지 않았지만 BMW의 생각은 달랐다.
2001년 BMW가 개발한 '뉴 미니'가 출시되자 전 세계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한때 '죽었던' 브랜드였던 미니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20만대가 팔리며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로버 매각과 미니의 부활로 BMW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BMW 미니 롤스로이스 3각 편대의 판매대수는 2002년 105만대,2003년 110만대,2004년 120만대,2005년 132만대 등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BMW그룹은 올 들어서도 3분기 만에 100만대 판매를 돌파하며 사상 최대 판매기록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