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는 최근 발표한 국가보고서에서 2000년 한 해 동안 대중에 전달한 정보량이 2035년엔 수초 만에 전달될 것으로 예측했다.

나아가 태초부터 1950년까지 생산된 정보량은 2025년엔 1년 만에 생산,유통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 7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미래회의 연설에서 레이 쿠즈웨인 인텔 부회장은 "2010년께면 컴퓨터가 소멸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각종 전자부품이 옷으로,몸 속으로,환경 속으로 파고 들어 개인 PC가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설명이다.

세계는 빛의 속도로 변하며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만고불변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21세기에 어느 조직이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면 소멸에 이르기 십상이다.

변화와 혁신에 실패한 '공룡기업'들이 화석화된 사례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포브스가 1987년 작성한 100대 기업 리스트엔 70년 전 이름을 올렸던 기업들 가운데 18개사만 잔존했다.

급속한 정보화가 진행된 지금 포브스가 100대 기업 리스트를 다시 만든다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들 것이 명확하다.

정부가 2003년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 10개 분야를 지정한데 이어 3년 만인 올 8월 차차세대 성장동력 산업 15개 분야를 발표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의 반영다.

차세대분야의 개발이 완료됐기 때문이 아니라 지능형로봇 미래형자동차 등의 기술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새로운 목표설정은 불가피했다는 게 산업자원부의 설명이다.

속도의 시대.기업 경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속도에 부적응하도록 만드는 기존의 모든 것을 얼마나 과감하게 파괴할 수 있느냐에 기업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1912년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가 '경제발전론'에서 주창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문제는 조직의 창조적 파괴를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인 관료주의 문화가 기업 내부는 물론 사회 전반에 상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존경받는 제너럴일렉트릭(GE).1898년 다우존스 산업지수에 최초로 포함된 미국 12개 우량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GE는 지난해 1600억달러 매출에 183억달러의 이익을 올렸다.

시가 총액은 4000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 기업이자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GE의 오늘은 관료주의를 혁파하며 끊임없이 기존의 것을 파괴해온 성과다.

'세계 최고 기업'이라는 말이 GE의 아이콘이 된 밑바탕엔 끊임없이 관료주의에 맞서 온 조직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GE는 실제로 비관료적인 조직문화로 유명하다.

회의실 좌석엔 직급에 따른 상석이나 하석과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정 좌석이 없고 누구든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이채욱 GE코리아 회장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GE가 얻은 것은 작고 민첩한 조직(계층이 적은 조직),비관료적인 벽 없는 조직,늘 배우고 정보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조직"이라고 분석했다.

조직 내 관료주의적 문화를 파괴하는 일은 삼성 현대차 LG 등 세계 속에서 경쟁하는 국내 대표 기업들에도 생존의 조건이 되고 있다.

예측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국내 일류기업들조차 벤처기업 같은 유연성을 갖추고 민첩한 조직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

러나 기업 내 관료주의를 파괴하는 것만으로 지속적인 성장과 혁신을 담보받기에는 또 다른 걸림돌이 존재한다.

기업을 둘러싼 외적인 경영환경 속에도 관료주의는 곳곳에 똬리를 틀고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최근 저서 '부의 미래'에서 미국의 기업,시민단체,가족,노동조합,정부,학교 등을 1∼100마일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9대의 자동차에 비유한 뒤 기업은 이 가운데 변화의 속도에 가장 민감하게 대처하며 100마일로 달리는 조직으로 묘사됐다.

그는 "소리만 요란한 관료조직과 규제집단을 25마일로 달리는 자동차"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천천히 변화할 뿐 아니라 기업의 속도마저 떨어뜨린다"고 비판했다.

한 대기업의 전략기획 담당 임원은 "관료주의를 끝없이 파괴하는 일은 기업이 존재하는 한 멈출 수 없는 과제"라고 전제,"그러나 정부 대학 노동조합 등 기업 경영의 외부 환경 변수들이 기업만큼 변화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출자총액제한은 기업이 꼽는 대표적 관료주의적 규제로 통한다.

아직도 '규제의 달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관료집단,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는 대학들, 20세기로 역주행하고 있는 대기업 노조들.파괴당하지 않으려면 파괴해야 하는 시대에 과연 얼마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지 자문해야할 때다.

한경이 창간 42주년에 즈음해 제안한 '2020년 20개 아이콘 브랜드를 만들자'는 구호도 사회 각 분야에서 관료주의를 혁파하지 못하고 변화의 속도에 뒤처진다면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