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한 속담이나 금언(金言)은 수없이 많다. 형체도 없는 소리에 불과한 말이지만 그 무게가 어느 것보다 무겁고,입은 재앙의 씨앗이니 말조심할 것을 강조한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설화(舌禍)라는 표현도 있듯,말은 '잘하면 약이고 못하면 독'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 출세하고,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언변이 당락을 좌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에 말을 잘못하거나 하지 않아야 할 말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개인의 파멸을 가져온 예도 비일비재하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이나 원로들의 말일수록 무섭다.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돼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되고,그 말을 다들 곱씹어 보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야 흔적이 안남지만,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공인(公人)의 말은 여간 조심스럽고 진중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다.

이번 이용훈 대법원장의 말을 둘러싼 파문만 해도 그렇다. 그가 작심한 듯 일갈한 "(검찰의) 수사기록을 던져 버려라" "변호사의 서류는 사람을 속이려는 것" "법조 3륜이 아니라 법원이 몸통"이라는 말은 원색적이고 오버한 표현이긴 했지만,정곡(正鵠)을 곧바로 찌른 것임에 틀림없다. 공판중심주의도 백번 옳은 방향이다.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이 대법원장은 '거친 말을 함부로 한 말실수'라고 사과 아닌 해명을 하면서도,"법원을 위해 크게 한건했다"며 오히려 한걸음 더 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가장 중요한 '진정성'이 빠졌다. 아무리 지당하고 좋은 말이라도 자극이 지나치면 그 진의(眞意)는 사라지고 상처와 불신만 남는다. 대법원장이 그의 말에 진정성을 담으려 했다면 검찰과 변호사의 행태를 탓하면서 법원의 우월성부터 내세울 게 아니라,지금껏 검찰 조서에 의존해 손쉽게 재판을 진행하던 스스로의 무사안일을 질타하고,검찰·변호사와 한통속이 돼 법원이 중심을 잡지 못해온 자신의 허물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했다.

솔직히 국민들의 눈에는 '강압적인' 검찰이나,'거짓말'만 일삼는 변호사나,뿌리깊은 '전관예우'의 그릇된 관행에 빠져 있는 법원이 잘해봤자 오십보 백보차이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잘하는데 남들이 문제라며 사법부의 최고 어른이 "한건 했다"는식의 품격잃은 언사(言辭)마저 서슴지 않은 것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이런 식의 서민적 표현이 권위의 탈을 벗고 국민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는 유용한 방법일 수는 있다. 또 대법원장의 발언만 문제될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부터 절제되지 않은 '저잣거리' 어법으로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고,인기마저 갉아 먹게 만든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문제는 지도층이 '거친 말을 함부로' 하다 보면,권위만 벗어 던지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신뢰마저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이 만연한 우리 사회다.

'세상만사 입에서 나온다'는 속담도 있고, '모든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어느 철학자 말씀도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말은 행동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추창근 논설위원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