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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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準亨 < 서울대 교수·공법학 >
중국 경제의 위력과 성장세는 이미 공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중국이 아무리 해도 한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있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의 권력이 서슬퍼렇게 살아있는데도 그 아들들을 감옥에 보낸 일이다.
중국인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일까.
한국 정치를 보는 외국인들의 시선은 냉랭하기 짝이 없는데,권력의 비리나 부패에 가차없이 메스를 가하는 쾌도난마의 법치(法治)효과로 보는 것일까.
오랜 정치적 억압 탓일까,한국의 정치문화는 '히스테리 민주주의'로 치달았다.
2004년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행된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겪어온 민주주의의 발작 증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을 면했지만, 이후에도 야당과 보수언론의 대통령 공격은 계속됐다. 대통령 비판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흔한 장면이 됐고,대통령 개그는 가수 송대관씨의 '네박자'처럼 국민적 소일거리가 돼버렸다.
한국 정치의 특징을 모든 것이 중앙의 권력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몰려가는 '소용돌이 정치(politics of vortex)'로 집약한 그레고리 헨더슨의 분석이 무색할 정도로 이젠 모든 세력들이 대통령에게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그런 의미에서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 탄핵의 주역들은 더러는 조용하게, 더러는 선거구민의 환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탄핵정국에서 덕을 본 여당과 의원들은 끝모를 혼돈에 빠져들고 말았다.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란 분위기이지만,열린우리당 간판으론 실추된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더 큰 공명을 일으킨다.
사실 탄핵은 우리 헌정사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전체 역사,특히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신하나 정치인들의 탄핵을 선비와 지식인들의 당연한 책무로 여겼던 정치문화에서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탄핵은 우리 정치 전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치의 흐름이 너무 오래, 끈질기게 사실상 히스테리에 가까운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비토와 탄핵으로 일관되어 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책임의 소재를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공격하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야당은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헌정수단을 총동원하고 보수언론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비토와 탄핵의 정치로 매진했고,우여곡절을 거쳐 그 전략은 먹혀들기 시작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분통을 터뜨릴 만한 일이지만,'코드인사' 논란이나 최근 불거지고 있는 '바다이야기' 등으로,마치 야당의 공격 명분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그때그때 건수를 올려준 정부·여당의 협조가 매우 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소설'들이 단단히 역정난 민심의 기억장치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래도 가장 굳건한 지지기반이었던 진보진영조차도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집권 4년, 어느덧 무능과 실정이 정권의 코드가 되어버렸고 그 사이 한국의 정치문화는 탄핵과 비토의 히스테리 민주주의로 두드러졌다.
어려움은 그렇게 불거진 히스테리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서 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의 김병준 교육부총리 낙마 사례가 그 점을 보여준다. 물론 혹독·신랄하기 짝이 없는 신상(身上)해부식 청문방식은 신임 부총리에게는 달리 적용될 여지가 없지 않다. 또 이번에는 그 인물의 정책성향이나 학문적 소신에 비추어, 김병준씨 본인은 분루를 금치 못하겠지만 여야간 공방이 역전되는 기현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각박할대로 각박해진 히스테리의 정치문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떠올리기조차 어지러운 단어지만,다음 정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지만,비토와 탄핵의 히스테리 민주주의는 그 가능성의 정치공간을 형편없이 축소시킨다.
정치는 재미가 없다.
정치인들은 자기장(磁氣場)이 재배열하듯 줄을 서느라 여념이 없지만,사람들은 어차피 그 나물이 그 나물인데도 환골탈태의 꿈을 꾼다.
세월이 간다.
중국 경제의 위력과 성장세는 이미 공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중국이 아무리 해도 한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있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의 권력이 서슬퍼렇게 살아있는데도 그 아들들을 감옥에 보낸 일이다.
중국인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일까.
한국 정치를 보는 외국인들의 시선은 냉랭하기 짝이 없는데,권력의 비리나 부패에 가차없이 메스를 가하는 쾌도난마의 법치(法治)효과로 보는 것일까.
오랜 정치적 억압 탓일까,한국의 정치문화는 '히스테리 민주주의'로 치달았다.
2004년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행된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겪어온 민주주의의 발작 증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을 면했지만, 이후에도 야당과 보수언론의 대통령 공격은 계속됐다. 대통령 비판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흔한 장면이 됐고,대통령 개그는 가수 송대관씨의 '네박자'처럼 국민적 소일거리가 돼버렸다.
한국 정치의 특징을 모든 것이 중앙의 권력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몰려가는 '소용돌이 정치(politics of vortex)'로 집약한 그레고리 헨더슨의 분석이 무색할 정도로 이젠 모든 세력들이 대통령에게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그런 의미에서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 탄핵의 주역들은 더러는 조용하게, 더러는 선거구민의 환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탄핵정국에서 덕을 본 여당과 의원들은 끝모를 혼돈에 빠져들고 말았다.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란 분위기이지만,열린우리당 간판으론 실추된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더 큰 공명을 일으킨다.
사실 탄핵은 우리 헌정사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전체 역사,특히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신하나 정치인들의 탄핵을 선비와 지식인들의 당연한 책무로 여겼던 정치문화에서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탄핵은 우리 정치 전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치의 흐름이 너무 오래, 끈질기게 사실상 히스테리에 가까운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비토와 탄핵으로 일관되어 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책임의 소재를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공격하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야당은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헌정수단을 총동원하고 보수언론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비토와 탄핵의 정치로 매진했고,우여곡절을 거쳐 그 전략은 먹혀들기 시작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분통을 터뜨릴 만한 일이지만,'코드인사' 논란이나 최근 불거지고 있는 '바다이야기' 등으로,마치 야당의 공격 명분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그때그때 건수를 올려준 정부·여당의 협조가 매우 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소설'들이 단단히 역정난 민심의 기억장치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래도 가장 굳건한 지지기반이었던 진보진영조차도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집권 4년, 어느덧 무능과 실정이 정권의 코드가 되어버렸고 그 사이 한국의 정치문화는 탄핵과 비토의 히스테리 민주주의로 두드러졌다.
어려움은 그렇게 불거진 히스테리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서 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의 김병준 교육부총리 낙마 사례가 그 점을 보여준다. 물론 혹독·신랄하기 짝이 없는 신상(身上)해부식 청문방식은 신임 부총리에게는 달리 적용될 여지가 없지 않다. 또 이번에는 그 인물의 정책성향이나 학문적 소신에 비추어, 김병준씨 본인은 분루를 금치 못하겠지만 여야간 공방이 역전되는 기현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각박할대로 각박해진 히스테리의 정치문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떠올리기조차 어지러운 단어지만,다음 정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지만,비토와 탄핵의 히스테리 민주주의는 그 가능성의 정치공간을 형편없이 축소시킨다.
정치는 재미가 없다.
정치인들은 자기장(磁氣場)이 재배열하듯 줄을 서느라 여념이 없지만,사람들은 어차피 그 나물이 그 나물인데도 환골탈태의 꿈을 꾼다.
세월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