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3 경제장관회의.옵서버로 참석한 피터 만델슨 유럽연합(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급히 찾았다.

'지지부진한 도하라운드(DDA) 타결을 위해 노력하자'는 의례적 만남으로 생각한 김 본부장에게 만델슨 집행위원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게 어떻겠냐.예비협의부터라도 시작해보자"는 것이었다.

김 본부장은 깜짝 놀랐다.

2004년 EU에 비공식적으로 FTA 추진 의사를 타진했을 때 "DDA 협상에 전념하겠다.

지금은 FTA엔 관심이 없다"는 소극적 대답만을 들었던 터여서다.

이후 한국과 EU는 지난 7월 1차 예비협의를 가졌다.

EU의 태도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EU가 한국과의 FTA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한국이 미국과 FTA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잘라말했다.

즉 한국이 미국과만 FTA를 맺으면 미국 상품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EU 상품은 한국 시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얘기다.

한국이 미국과 FTA 협상에 나선 이후 한국에 '러브콜'을 걸어오는 곳은 EU만이 아니다.

호주 뉴질랜드 걸프협력회의(GCC) 등도 손을 내밀고 있다.

국제협상은 아쉬워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많은 것을 양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국과의 협상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미 제3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정재화 무역협회 FTA 팀장은 "미국과 FTA가 성사되면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 우리가 칼자루를 쥐게 된다.

한국과 FTA를 맺지 못하면 미국 제품이 연간 3000억달러 규모의 한국 수입시장을 완전 장악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실제 중국은 한·미 FTA로 미국 농산물이 중국산을 대체할 가능성이 커지자 최근 FTA를 하면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FTA를 활용해 'FTA 허브',더 나아가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로 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경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은 "한·미 FTA를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해 동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구축에 든든한 디딤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한국이 미국에 이어 EU와 FTA를 맺는다면 세계 시장의 60%를 경쟁국에 앞서 선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중·일 3국이 경쟁적으로 FTA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중국 일본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우리는 주변국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FTA 허브가 될 경우 동북아 물류·금융 허브는 저절로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도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 FTA를 맺고,이를 지렛대로 중국 일본 등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FTA 허브로 부상한다는 전략이다.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는 "주요국들이 FTA에 매진하고 있어 향후 5~6년이면 세계 FTA 구도가 완성될 것"이라며 "지금이 FTA 추진에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