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그룹은 재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보수적인 그룹이다.

모기업인 태광산업의 '부채비율 0%'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너는 물론이고 각 계열사의 전문경영인들도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재계의 '크렘린'으로 통했을 정도.이런 태광이 리스크 높은 금융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이목을 끌고 있다.




태광그룹은 올들어 쌍용화재 피데스증권 예가람저축은행을 잇따라 인수했다.

기존 흥국생명 태광투신 고려저축은행을 합쳐 금융계열사가 6개로 늘어났다.

총 자산은 7조2000억원.은행만 빼고 모든 금융 영역을 아우르는 금융그룹 체제를 갖춘 셈이다.

크렘린의 벽을 허무는 사건은 지난 3월 발생했다.

주력 금융 계열사인 흥국생명이 56년 역사상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한 것.이 자리에서 김성태 흥국생명 사장은 "흥국생명을 중심으로 금융그룹을 형성해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흥국금융그룹'의 출범을 대내외에 공식 선포한 것이다.

이후 흥국쌍용화재 흥국증권 흥국투신 등으로 계열사의 사명을 통일했다.

오는 10월께 태광그룹과는 별도로 금융계열사들만 공유하는 CI(기업이미지)를 선보인다.

흥국금융그룹의 장기 비전은 금융지주회사.다만 태광산업 등이 금융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는 현재의 지분 구조를 감안하면 단시일 내 이뤄지기는 힘들다.

진형준 흥국생명 부사장도 "명실상부한 금융그룹체제(지주회사)를 이뤄 원스톱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우선 계열사별로 내실을 다지며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는 계열사별 '몸짱 만들기'에 치중하겠다는 뜻이다.

흥국쌍용화재는 이미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함께 인터넷 자동차보험 등 수익성 높은 사업에 집중함으로써 금융감독원의 경영 개선 조치 대상에서 졸업했다.

6월 말 현재 지급여력비율 160%를 넘어선 것이다.

위탁매매 전문 증권사인 흥국증권중개에 대해서는 지난 5월 67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자본금을 100억원으로 확충했다.

앞으로 자본금을 더 늘려 투자은행 업무까지 할 수 있는 종합증권사로 키운다는 복안이다.

저축은행부문에서도 강자로 부상했다.

예가람저축은행을 인수,영업망을 기존 부산·경남권(고려저축은행)에서 서울·수도권으로 확대하며 자산 규모 7200억원으로 뛰어올랐다.

그룹의 주축인 흥국생명은 건강보험 등 보장성 보험 판매에 주력하면서 변액보험과 장례보험 판매를 확대하고,인터넷 보험 판매도 강화할 계획이다.

연간 600억원 수준인 흑자를 3년 내 1000억원 정도로 늘리고 외형도 현재 8∼9위에서 5∼6위권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흥국금융그룹의 발빠른 행보와 관련,오히려 '과속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진 부사장은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5년 전부터 보수적 경영에서 탈피해 왔다"고 강조한다.

우선 층층시하였던 결재 라인을 축소했다.

젊은 인재의 외부 수혈로 조직이 젊어졌으며 의사결정이 신속해졌다.

불필요한 형식도 타파했다.

일례로 사장을 제외한 모든 임원은 비서가 없다.

진 부사장도 전화를 직접 하고 손님이 오면 손수 차를 건넨다.

불과 3∼4개월 만에 3개 금융회사를 전광석화처럼 인수할 수 있었던 것도 신속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업문화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게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물론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창업자 고 이임용 회장의 3남인 이호진 회장(44)이 있다.

이 회장은 섬유산업을 대신해 금융을 그룹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삼겠다는 경영전략을 일찌감치 내비쳤다.

1조5000억원이라는 막대한 현금을 쥐고 있는 태광산업이 이번에는 또 어떤 금융회사를 찾아나설지 주목된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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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진 회장은‥ ]

이호진 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81학번)를 나와 미국 코넬대 경영학석사(MBA),뉴욕대 박사과정을 마친 뒤 1993년 흥국생명 이사로 경영에 첫발을 내디뎠다.

첫 출근 날 감색 양복에 분홍색 드레스셔츠를 입은 그의 복장은 보수 기업의 대명사로 통하는 태광그룹에 '충격'이었다.

그후 임직원 복장이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뒤 그룹회장에 오른 이 회장은 서울대 동기인 진헌진 티브로드 사장(태광계열 케이블 방송사),진형준 흥국생명 부사장과 함께 그룹의 대변신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