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에선 이젠 저보고 아예 사장 자리를 맡아 달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사는 건 딱 질색입니다. 본사를 한국으로 옮긴다면 그 때 고려해보겠다고 했지요."

미국 대형 반도체 장비회사에 인수된 국내 중소기업 전문경영인이 미국 본사 '제 2인자'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선임돼 눈길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지난달 16일 미국의 포토마스크 생산업체인 포트로닉스의 COO로 취임한 피케이엘의 정수홍 사장(51·사진).피케이엘의 모회사인 포트로닉스는 세계 포토마스크 시장에서 일본의 DNP사에 이어 2위 업체로 군림하고 있다.

포트로닉스의 아시아 사장직을 겸직하는 정 사장은 이번 인사로 한국 피케이엘 공장을 포함,미국과 영국 등 11개 공장의 운영과 장기 생산플랜을 짜는 중책을 맡게 됐다.

정 사장은 지난 1980년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삼성반도체 등을 거쳐 아남반도체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95년 그룹에서 분사한 피케이엘의 사장 자리를 맡았다.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순항하던 피케이엘은 외환위기로 인한 모회사의 재무여건 악화로 98년께 주인이 외국계 자본으로 바뀌었다.

2000년엔 코스닥에 상장했지만 2년 뒤 외국계 자본이 재차 회사를 포트로닉스에 매각하며 정 사장은 졸지에 기댈 곳 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앞에 큰 산을 죽을 힘을 다해 넘어가면 더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며 "당시 주위에선 '얼마나 버티겠냐'는 안쓰런 눈길을 보냈지만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내가 해야 할일을 해 나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002년 피케이엘이 매각된 뒤 정 사장은 그 해 말 673억원의 매출을 시작으로 2003년 989억원,2004년 1284억원을 각각 올렸다.

대부분의 반도체 장비사들이 2001년 이후 반도체 경기침체로 저조한 실적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끌어 냈다.

차갑던 포트로닉스 본사 경영진의 시선도 달라져 갔다.

포트로닉스는 2005년 정 사장에게 포트로닉스 아시아 사장직을 맡겼다.

작년 4월에는 정 사장의 제안을 적극 수락,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던 중앙연구소를 충남 천안에 옮겼다.

지난 1월에는 경기도에 3억달러 규모의 최첨단 포토마스크 생산시설을 짓기로 했다.

정 사장은 COO 업무 파악을 이달까지 끝내고 다음 달께 11개 공장을 순방할 예정이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