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聖哲 <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chungsc@stepi.re.kr >

우리는 대개 과학이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연구개발을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발전에 있어서 과학의 역할은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폭넓다.

과학은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정신을 통해 사회발전을 유도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도 한다.

일례로 영국 과학정신을 대표하는 왕립한림원과 생명보험산업 출생과의 관계를 보자.

영국왕립한림원은 과학자 의사 귀족 변호사 혹은 고위 공무원이나 문인 등을 회원으로 1660년 창립된 영국 과학의 대표기관이다.

그런데 창립 2년 뒤인 1662년 한 포목상(布木商)이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하여 한림원 내부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과학자도 아니요 귀족도 아닌 일개 포목상인을 한림원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림원은 이 포목상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의 잠재적 기여도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문제의 포목상은 바로 존 그론트라는 사람으로 당시 인구통계 관련 저서를 내어 세인(世人)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1563년 런던 교구는 사망자에 대한 기록을 시작했고 그 후 사망의 원인 등 기록의 내용을 세부화해 매년 이를 자료로 발표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이 자료는 누가 무슨 일로 어떻게 죽었더라는 등 일반 사람들 사이에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용도로 활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존 그론트는 이 자료를 이용,보통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혁신적인 작업을 해 그 결과를 1662년 저서로 발표했다.

그는 1604년에서 1661년에 이르는 약 60년간의 자료를 정리 분석해 '사망기록에 나타난 자연적ㆍ정치적 현상'이라는 저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론트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통계적 사실을 처음으로 설명했다. 즉 "남아 출생률이 여아보다 높고,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며,매년 사망률은 대체로 비슷하다.

또한 결혼 적령기(適齡期)가 되면 남녀 인구가 비슷하게 돼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럽게 유지된다"는 것 등이다. 또한 그론트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연령별 예상수명(壽命)을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다.

그가 한림원의 회원이 되면서 그의 저서는 더욱 주목을 받게 됐고 그의 예상수명표를 아이디어로 활용해 37년 후에는 세계 최초의 생명보험사가 문을 열게 됐다.

결과적으로 영국 왕립한림원이 진흙 속에 파묻혀 잊혀질 수도 있었던 그론트의 작업 결과를 경제사회적 발전에 유용한 '진주'로 인정해 발굴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추어 통계학자 그론트의 탐구정신을 높이 평가해 그를 한림원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적 과학정신이 아니었더라면 영국이 오늘과 같이 세계 보험산업의 중심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