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동계가 노동운동의 발상지인 유럽의 산별체제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나 정작 유럽국가들은 기업별체제로 분권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화 개방화 시대를 맞아 기업간 경쟁이 격화되고 경영실적의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근로조건을 비슷하게 결정하는 산별교섭의 문제점이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산별노조는 노동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중세 이후 같은 직종에 종사하던 장인들의 모임인 길드가 발전해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길드는 직종별 노동조합 형태를 띠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산별노조로 바뀌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탄생한 산별노조는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효율성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점차 기업별 노조로 대체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이미 1960년대 말 산별교섭이 개별 사업장의 문제점을 해소하지 못하고 노사불안만 부채질한다는 지적이 일면서 개별교섭으로의 전환이 대거 이뤄졌다.

이때 도노반위원회(노동자 저항의 원인을 분석하고 노동운동의 제도화를 시도했던 단체)까지 나서 개별교섭을 적극 권장해 산별체제가 무너지고 개별교섭 체제가 일반적인 교섭형태로 자리잡았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기업별 교섭을 도입하는 사업장들이 급증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산별교섭을 벌이지만 대기업들은 기업별 교섭을 선호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에서도 대규모 다국적 기업을 중심으로 기업단위 교섭이 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필립스와 KLM 등은 기업별 협상을 벌이는 대표적 사업장으로 꼽힌다.

산별협약을 통해 노사안정을 꾀해온 독일에서도 개별기업 협상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 가운데는 폭스바겐,지멘스 등이 이미 개별교섭을 도입하고 있으며 산별교섭에 부담을 느껴 사용자단체를 탈퇴하는 기업들도 많다.

특히 경영난을 겪는 기업들이 늘면서 산별교섭 체결내용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협상을 체결하는 이른바 '개방조항'을 도입하는 중소기업들이 늘고 있다.

개방조항의 확산은 산별교섭의 핵심인 노동자 연대원칙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독일 노동현장의 분권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일본은 대부분이 기업별 교섭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전체 노조원수 1200여만명 가운데 86%(1100여만명)에 달하며 나머지가 직업별 산업별 노조 등에 소속돼 있다.

기업별노조는 산업별 지역별 노조연맹에 가입돼 있으나 상급 단체의 통제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기업별 조합은 동일 기업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종업원만을 조합원으로 인정하며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가 혼합된 조직 형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일본 노동계 내에서도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나 실제로 전환된 노조수는 미미한 실정이다.

미국의 경우 산별과 기업별 교섭이 혼재해 있는 상태다.

박영범 한성대교수(경제학)는 "선진국에선 교섭체계가 분권화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노조는 세계적 추세와는 반대로 중앙집권적 산별교섭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는 오랫동안 기업별 체제에 물든 우리에게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만 낭비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