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독일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있어서일까.

태극전사들이 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네 옛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수많은 한국인들은 광부와 간호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을 밟았다.

독일인들은 누구나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먹고살기 급급했던 탓에 그런 일자리나마 감지덕지로 여겨야 했다.

당시 독일을 방문했던 대통령 내외와 파견 근로자들이 만났던 자리가 처량한 처지 때문에 눈물바다를 이뤘던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돼 있다.

하지만 지금 독일 경기장을 누비는 태극전사들의 모습은 그런 기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승1무라는 성적이 보여주듯 세계적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어떤 상대를 만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요즘 우리 선수들에겐 과거 보기 힘들었던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다.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점이다.

유럽팀들을 만나도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 경기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부터 프랑스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 수많은 유럽팀과 거의 대등하게 경기를 벌여왔고 체력적으로는 오히려 앞선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유럽팀만 만나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다 "체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변명만 늘어놓던 과거와는 정말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든다.

우리 선수들의 체력이 괄목상대할 정도로 향상된 것은 기본적으로 신체조건이 과거에 비해 크게 좋아진 때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나라 20대 젊은 남자들의 평균 키는 2004년 현재 173.2cm로 25년 만에 5.8cm가 커졌다.

아직 유럽인들보다 작긴 하지만 격차가 크게 줄었다.

유럽인들 중 키가 작은 편인 이탈리아인과의 격차는 1.3cm에 불과하다.

몸무게 역시 평균 69.8㎏에 달해 8.8㎏이나 늘었다.

그러니 유럽인들과 맞부딪혀도 쉽사리 나가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체격 변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일취월장으로 성장한 우리의 경제력 덕분이다.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할 수 없었다면, 어찌 키가 자라고 어깨가 벌어졌겠으며 유럽팀과 대등한 체력으로 당당히 승부를 겨룰 수 있었겠는가.

붉은 악마들이 독일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안방같은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하는 것도 경제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광부와 간호원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경제력의 초석을 다졌던 까닭이다.

피복공장에서 신발회사에서 밤늦게까지 일한 여공들이 없었다면,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땀흘린 건설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어찌 한강의 기적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지금은 외국인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오히려 우리나라로 몰려 들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런 점에서 피와 땀과 눈물로 폐허에서 오늘의 기반을 일궈낸 중장년 세대들이 한없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시청앞에서 광화문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태극전사들에게만 환호할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들의 노고를 헤아리면서 앞으로는 유럽을 능가하는 체격과 경제력을 가진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져줬으면 싶다.

이봉구 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