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차 독일 서남부 지역을 기차로 여행하던 중이었다. 기차가 도르트문트역에 멈추더니 한참이 지나도 출발하지 않았다. 20분가량 지났을까.

그제서야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다음 역에서 폭발물 검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바쁜 승객은 다른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는 게 낫겠다는 내용이었다. 승객들은 그제서야 기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항의나 불평은 한마디도 없었다.

지하철이 제때 도착하지 않을 때마다 격렬히 항의하는 모습에 익숙한 기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안내를 맡은 이인자씨(37·독일 브레멘대 박사과정)는 "독일 사람들은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러나 이런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승객들이 지금은 흥분하지 않고 기차에서 내리고 있지만 분명히 이들 중 상당수는 열차 운행 지연에 대한 서류를 작성해 철도청에 보낼 겁니다.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고 다시는 승객 불편을 없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결코 문제점을 잊지 않는 게 독일인들의 저력이라는 설명이었다.

독일인들의 이런 기질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월드컵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시민들의 표정이나 거리 모습에선 주최국의 흥분된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가끔 중앙 광장에서 열리는 미니 축구대회에서나 월드컵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TV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월드컵보다는 '저출산' '의료개혁' '조세개혁' 등 각종 경제 이슈들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녁 뉴스까지 절반가량을 월드컵 관련 뉴스에 할애하는 우리 방송사들과는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선거가 끝나면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국민연금법 개정 등 굵직굵직한 경제 현안 10여건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분위기를 되새겨 자칫 흥분 속에 파묻혀 제대로 논의조차 거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넘어갈 우려도 적지 않다.

자기 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데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독일인들의 모습에서 흉내내기 어려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쾰른(독일)=박수진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