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비자금 수사가 잇단 악재로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구속을 놓고 "무리한 수사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검찰 조사를 받던 박석안 전 서울시 주택국장이 자살하면서 검찰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특히 박 전 국장은 유언에서 "검찰이 종합작품을 만들기 위해 서울시의 책임을 무리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며 강압수사 의혹을 제기,적지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대검 중수부는 비자금 용처 수사와 관련,대외적으로는 여전히 "향후 수사는 일정대로 간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비자금의 용처 수사가 난항을 겪으면서 사실상 '끝내기수사'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분석된다.

◆"나는 결백하다"

15일 오전 10시께 경기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팔당호에서 보트를 타고 순찰을 돌던 팔당 상수원 관리사무소 한강감시원이 강물에 떠있는 박씨의 사체를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박씨가 광동교에서 투신 자살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대검 중수부는 "서울시의 현대차 사옥 증축 인·허가 경위에 대한 기초조사 과정에서 박씨가 현대차로부터 그랜저XG를 730만원 할인된 2934만원에 구입한 품의서를 압수해 4월 말부터 다섯 차례 소환 조사했었고,정확한 구입 경위 등을 밝히기 위해 오전 9시30분까지 출두하도록 통보했었다"고 밝혔다.

박씨는 대검 중수부 조사에서 2934만원을 처남에게서 받았다고 진술했으며,지난 12일에는 처남과 함께 조사를 받았다.

박씨는 주택국장으로 근무할 당시 서울시 건축위원회 위원장 겸 도시계획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양재동 현대차 사옥 증축 인·허가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조사 과정에서 폭언이나 폭행 등 무리한 점은 없었다.

박씨는 조사실이 아닌 공개된 사무실에서 조사받았고,변호인이 조사 과정을 전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는 전날 새벽 자택 서재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박석안의 고백'이라는 A4용지 3장 분량의 글에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수사관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본인이 현대차나 설계회사로부터 금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괴롭혀서 항복을 받아낼 욕심으로 나와 돈 거래한 처남은 물론 처남과 돈거래한 사람까지 (수사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변호사가 아무리 유능하고 사법부가 공정하다 해도 대검 중수부를 이길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며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도 드러냈다.

◆답보 중인 사용처 수사

정 회장을 구속할 때까지만 해도 전광석화와도 같던 검찰 수사가 요즘은 한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그가 1200여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에 대해선 밝혀냈지만 이를 어디에 썼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상명 검찰총장은 이날 아침 정의선 사장을 비롯한 현대차 관계자에 대한 일괄 기소 연기를 지시했다.

검찰은 당초 정 사장을 제외하곤 16일 일괄 기소할 예정이었다.

채 수사기획관은 "비자금의 구체적 사용처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날 아침 박씨 죽음과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답했다.

박씨는 현대차 사옥 증축 인·허가와 관련,검찰 수사를 받아온 서울시 관계자 중 최고위급이었다.

현대차 비자금사건이 금융브로커 김재록씨의 사옥 인·허가 로비 의혹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의 한 축이 마비가 된 셈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결국 현대차그룹 회장을 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될텐데 검찰이 모양새 갖추기에 주력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도 나오고 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