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최고 여성 CEO 김만덕을 아시나요‥'꽃으로 피기보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나는 제주의 양갓집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관기(官妓)에 의탁해 살았다.
그러나 스무살 무렵 관아에 찾아가 양민의 신분을 회복하고 바로 상업에 뛰어들었다.
만약 다른 기녀들처럼 살았다면 기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첩이 되는 길 뿐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행상으로 돈을 모았다.
종잣돈이 생기자 포구에 객주를 차렸다.
수하에 남성을 거느리며 큰 규모의 객주를 운영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노비나 기녀가 아닌 여성이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사회제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던 당시 나는 운송체계에 기초한 유통망이 상업발전의 근간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객주는 여관 구실뿐만 아니라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중간상의 역할도 했다.
제주 양반층 부녀자에게는 육지의 옷감과 장신구,화장품을 팔고 육지 사람들에게는 제주 특산물인 미역 전복 말총 귤 등을 팔았다.
나중엔 배를 사서 육지와 직거래하며 수공업자나 목축민 등과 계약을 맺고 주문생산하는 '선대제'방식으로 사업을 키웠다.
그리고 제주 최고의 거상(巨商)이 되었다.
1795년 최악의 기근이 닥쳤을 때 나는 큰 결심을 했다.
힘들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전재산을 털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곳간을 열어라!" 하고 외칠 때 나는 그동안의 성취와 열정 못지않은 희열을 다시 한번 느꼈다.
200년 전의 조선 여장부 김만덕 이야기를 담은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정창권 지음,푸른숲)의 얼개다.
이 책은 맨주먹 여성으로 운명을 개척한 혁신적 기업가이자 참나눔을 실천한 선구적 자선가의 진면목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인다.
저자는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향랑,산유화로 지다' 등을 통해 미시사 분야의 새로운 글쓰기로 주목받아온 국문학자.
이 책에서 그는 변변한 사료조차 남아있지 않은 한 제주 여인의 삶을 되살리면서 '축적'보다 '성취'에 대한 열정,앞을 내다보는 예견력과 꿈을 이루어가는 단계,18세기 제주 문화사까지를 촘촘하게 복원했다.
유배의 땅에서 관광지로 탈바꿈한 제주의 몸체를 독특한 산물과 뛰어난 해운기술을 가진 상업 중심지로 되살려낸 것도 굵직한 결실이다.
김만덕은 제주에서 '만덕 할망'으로 불리며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 경영자들의 덕목이 강조되는 요즘 우리나라 여성 화폐인물 1호로 추대(?)되고 있는 그의 일생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과 과감한 투자,모험 정신으로 변방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과정,당시의 생활사 자료를 동영상처럼 보여주는 입체적 서술형태가 씨줄 날줄로 잘 엮여진 책이다.
244쪽,1만1000원.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