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시작됐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내부인사인 만큼 역대 어느 총재보다 책임과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한국은행의 독립성 제고에 노력해 주었으면 한다. 이 총재는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소신이 뚜렷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책임을 지고 노력해 온 만큼 기대하는 바가 크다. 최고책임자가 됐다고 해서 소신을 바꾸는 모습은 이 총재에게서 만큼은 없었으면 한다. 한국은행 독립성이 제고되면 중앙은행의 고유권한인 금리결정의 중립성이 더 확보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 당면한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구성시 지나치게 관료 위주나 특정 인맥 중심으로 채워지지 않도록 최고임명권자인 대통령이 한번쯤은 고심·협조해 줘야 할 사안이다.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한국은행의 예측력을 높이기 위해 조사연구 업무를 강화하는 과제도 시급하다. 다른 전망기관보다 신속하게, 그것도 예측력이 월등히 높지 않고서는 신뢰성을 높일 수 없고 따라서 선제적인 통화정책도 펼치기 어렵다. 한국은행의 신뢰를 확보하는 과제는 통화정책 전달과정에서 금리와 민간소비,기업의 설비투자와 같은 총수요간의 민감도(elasticity)를 끌어올리는 데 특히 중요하다. 환율관리 등은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지향해 악화된 수지를 개선하고, 너무 정치와 인기에 영합해 말과 정책을 바꾸거나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경제성장률과 같은 예측치를 언급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아무래도 우리 현실에서는 직설적인 '버냉키식 화법'보다는 말을 아끼는 '그린스펀 화법'이 더 나아 보인다. 또 통화정책 추진과정에서 흐트러진 정책수단과 중간조작목표,최종목표 간의 인과관계(casuality)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를테면 중앙은행 입장에서 경제성장과 물가안정 간의 우선목표를 정하고 이를 위해 금리조작이냐 통화량 변경이냐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갈수록 디지털화와 대안화폐가 확산되는 추세에 맞춰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놓고 이제는 심각하게 고심해야 할 시점이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통화지표를 개발하고 통화유통 속도, 통화승수를 정확히 추정하는 한편 위조지폐 방지 등을 통해 법화(legal tender)인 한국은행권의 위상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중장기적인 과제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논란이 돼왔던 고액권 발행과 화폐의 거래단위를 축소하는 원화의 디노미네이션, 아시아 단일통화 개발 등 인접국가와의 금융협력, 그리고 각종 가중치와 산출방식의 현실화를 골자로 한 통계개편 작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일도 중요하다. "해외출장시 직업란에 'central banker'를 자랑스럽게 써라." 한은 입행 후 첫 연수 때 선배가 해준 말이다. 이 말이 여전히 통할 수 있도록 이 총재는 한국은행과 한은맨들의 위상을 지켜주기 바란다. 한상춘 논설ㆍ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