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의 불법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가 임박한 것으로 점쳐졌던 정몽구 현대ㆍ기아차그룹 회장이 2일 오후 전격 출국함으로써 검찰 수사가 차질을 빚을 것으로 우려된다. 특히 정 회장은 그룹 계열사들이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있는데도 검찰과 사전 협의조차 하지 않고 출국한 것으로 확인돼 도피성 출국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 그룹은 정 회장의 방미가 현지 공장 방문과 판매 독려 등 업무를 위한 것으로 사전에 계획된 경영활동의 일환이라며 도피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고 있어 조기 귀국 여부가 검찰 수사에 변수가 될 전망이다. ◇ 슬그머니 출국 검찰은 지난달 26일 현대차그룹을 전격 압수수색한 데 이어 물류 계열사인 글로비스와 전장부품 계열사인 현대오토넷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파헤치는 등 수사 범위를 급격히 확대해왔다. 양재동 현대차그룹 신사옥을 매입할 당시 김재록씨의 로비를 이용해 원래 가격보다 수백억원 싸게 사들였다는 의혹도 은밀히 조사해왔다. 이 과정에서 검찰의 수사망은 계열사 임원 뿐만 아니라 채양기 기획총괄본부장 등 그룹 핵심 수뇌부까지 좁혀들어가는 양상이었고 정 회장과 정의선 사장 조사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특히 글로비스와 현대오토넷의 경우 정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대주주인데다 경영권 승계와 밀접히 관련된 계열사여서 검찰이 현대차의 후계구도에도 손을 대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점차 힘을 얻었다. 따라서 현대차그룹 계열사 임원들을 무더기 출국금지 조치를 하면서도 정몽구 회장 등 오너 일가에 대해서는 기업 신인도 등을 고려해 출국을 금지하지 않은 검찰에게 이번 정회장의 출국은 최대 악재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은 현대차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고려해 정회장을 출금대상에서 제외했으나 만약 정 회장이 귀국하지 않는다면 수사에 차질을 빚으면서 검찰이 역풍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건희ㆍ김우중 악몽 재연되나 정회장이 귀국하지 않으면 이번 검찰 수사가 비리 의혹의 뿌리까지 파헤친다는 당초 의지는 실현되기 힘들어진다. 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의 핵심은 비자금 조성 주체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가느냐였다. 비자금 조성을 지시한 것은 누구고, 비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느냐를 밝히는 게 검찰 수사의 본류였다. 당연히 그룹 최고위층의 관련 여부 규명이 수사의 초점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비자금 조성 의혹, 양재동 사옥 관련 로비 의혹 등과 관련해 검찰 수사망 안에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큰 상태였던 정 회장이 조기에 귀국하지 않는다면 이런 의혹은 사실상 수면 밑으로 잠기게 된다. 따라서 정 회장의 갑작스런 출국은 검찰 수사를 앞두고 굴지의 재벌 회장들이 밟았던 전철을 떠올리게 한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그룹이 부도 위기에 처했던 1999년 10월 중국에서 열린 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귀국하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추고 5년 8개월간 은둔생활을 하다 지난해 6월에야 귀국해 법정에 섰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안기부ㆍ국정원 불법도청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9월 정기 검진과 휴양을 이유로 돌연 출국했고 검찰 수사가 마무리된 금년 2월에야 귀국했다. 이들 재벌 오너가 갑작스런 해외 출국을 할 때마다 검찰 수사는 큰 차질을 빚었다는 점에서 검찰은 과거의 악몽이 재연되지 않을까 우려하며 정 회장의 조기 귀국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이 일정대로 1주일 뒤 귀국하지 않고 이건희ㆍ김우중 회장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면 검찰은 `해외도피'를 사실상 방조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이 재계 선배들이 밟은 악습을 되풀이할지, 해외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그룹을 의연하게 추스르는 대기업 총수다운 모습을 보여줄지는 1주일 뒤에나 판가름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연합뉴스) 조성현 기자 eyebrow76@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