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의 핵심 인사들은 1주일간 스웨덴을 방문했다.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과 이 그룹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터 등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발렌베리는 150년 동안 5세대에 걸쳐 이른바 '세습경영'을 하면서도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 존경을 받는 가문이다. 스웨덴 전체 주식시장의 절반가량을 발렌베리 그룹의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는 데도 국민들의 반재벌 정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존경받는 기업 발렌베리家(가)의 신화'(장승규 지음,새로운제안)는 이런 발렌베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위상을 갖게 됐는지에 주목한다. 1856년 설립된 이래 2000년대 초반 IT버블 붕괴의 여파로 잠시 주춤한 것을 빼고는 줄곧 성장가도를 달리며 가족경영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자리잡기까지 파란만장한 발렌베리가의 역사와,14개의 핵심 자회사들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과정을 통해 발렌베리의 성공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발렌베리의 역사는 현재 SEB은행의 전신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을 창업한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스웨덴은 근대적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면서 자금 수요가 급증했고 근대적 은행 시스템을 갖춘 이 은행은 산업부문 대출을 강화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앙드레가 죽고 가업을 승계한 장남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는 부실기업을 인수해 회생시키는 방식으로 거대한 산업왕국을 탄생시킨다. 이 때 확립된 것이 '선장이 우선,그 다음이 배'라는 원칙이다. 이는 해군의 전통을 이은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원칙으로 기업의 성공은 선장격인 유능한 CEO 확보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이후 발렌베리 가문은 후계자의 자살과 기업 사냥꾼의 도발 등 숱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거듭해 거대 재벌의 입지를 굳혔다. 휴대전화로 낯익은 에릭슨(통신장비)을 비롯해 대형 트럭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스카니아,세계 가전시장을 주도하는 일렉트로룩스,하이테크 전투기의 강자 사브 등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만 14개에 달한다. 무엇이 발렌베리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을까. 저자는 발렌베리 가문의 승계전략과 기업경영의 원칙,사회적 책임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성공비밀을 찾아내고 있다. 우선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들은 일찍부터 치밀한 양육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된다. 또한 거대한 왕국을 이끄는 것은 아무리 유능한 경영자라도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투 톱 체제로 운영하는 것도 발렌베리 가문의 특징이다. 또한 가문의 부(富)를 선물로 여기고 강한 책임감과 기업가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성공의 비결이다. 기업 경영과 관련해서는 '선장 우선'의 원칙과 함께 자회사들을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경영하는 것도 발렌베리의 특징이다. 어떤 자회사도 발렌베리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대신 자회사들이 거둔 성과는 최대주주인 인베스터를 통해 최종적으로 발렌베리 재단으로 모이게 돼 있다. 재단은 이렇게 모인 수익금을 대부분 스웨덴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씀으로써 경영성과를 사회로 되돌린다. 저자는 "발렌베리 가문은 적극적인 오너십을 행사하면서도 투명성과 사회공헌을 통해 사회의 존경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쪽,1만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