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절제 아쉬운 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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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엊그제 우리는 희한한 정치해프닝을 목격했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사이에 가시 돋친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말이 좋아 '설전'이지 '육탄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홍 의원이 '윤상림 사건'과 이 총리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이 발단이 됐다.
발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꼴불견 싸움으로 치달은 것은 '상호존중의 언어'가 실종되고 '상호비방의 언어'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말로 천냥 빚을 갚기는커녕 말로 독배를 주고받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천민화된 정치의 단면일지언정,어떻게 '토론 공화국'의 제 모습이라고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인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 질문을 반추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치가 누군가, 무엇인가를 대변하는 행위라면 정치인은 누군가,무엇인가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대변의 행위는 친숙하리만큼 일상적인 행위다.
무궁화는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꽃이고 애국가는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노래다.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탁월한 인격과 자질의 소유자가 자신을 대변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자신의 품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만한 기량을 가진 빙상선수가 한국스포츠를 대변해야지 기량과 경험,연습도 부족한 선수가 대변해서는 곤란하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미가 꽃을 대표하는 것이지 못생긴 호박꽃이 대표 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동물들도 이솝우화에서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영양이나 꾀만 많은 여우,볼품없는 고슴도치보다는 용맹무쌍한 사자가 '동물의 왕국'을 대변하기를 바란다고 부르짖지 않겠는가.
이처럼 타자를 대표한다는 것은 최상의 품위와 기량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민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왜 어물전 망신을 시키는 꼴뚜기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정치란 '고상한 직업'이 아니라 '비열한 직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인가.
특히 한나라의 국무총리라면 보다 낮은 데로 임할 필요가 있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있는 사람의 겸손함은 야당 정치인에 대한 비굴함이나 겁먹음이 아니라 국민들에 대한 기본예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야가 격돌하는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고는 하나,여당의 실세총리라 하여 너무나 뻣뻣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면 야당정치인을 제압하고 이겨볼 수는 있겠지만,국민들을 이겨보겠다는 오만함으로 비쳐지게 마련이다.
정치인의 품격은 곧 정치의 품격이다.
교육의 질이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듯이 정치의 질도 정치인의 자질을 능가할 수 없다.
한국정치가 곧잘 3류정치로 평가받는 건 정치인들이 봉사정신보다는 속물근성을 가지고 임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티끌은 열심히 찾는다. 이 착시현상 때문에 문제만 생기면 '내 탓'이 아닌 '네 탓'을 한다.
지금 우리 정치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있다면 절제다. 한국정치는 똑똑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다. 내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그 사람의 허물을 공격적으로 들춰내는데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똑똑한 것이고,국회의사당에서 신성모독인 줄도 모르고 육두문자를 쓰며 서로 싸우니 용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똑똑함이 '겉똑똑이'에 불과하고 그 용감함이 실제로는 '만용'으로 비판받는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런 무지라면 이는 죄악인 셈이다. 콘텐츠도 없는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폭로하고 함부로 재단한다면,그것이야말로 자기절제력을 잃은 속물정치의 근성이다.
언제쯤 절제력을 잃은 오만함의 정치가 겸손한 봉사의 정치로 전환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