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 경희대 교수 "할일 많은 난 영원한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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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전봇대나 나무 꼭대기같은 높은 곳에 오르는 걸 좋아했다.
태어난 고향인 일본의 후쿠이(福井)현에서도,5살 때 귀국한 한국에서도 틈만나면 높은 곳에 오르락 내리락 했다.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수많은 추락의 사연도 간직하게 됐다.
엎어지고 깨지고 부러지고…. 소년의 모친은 "전봇대에 올라가지 말라,나무꼭대기에 올라가지 말라"는 충고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그 소년은 어느 덧 한국에서 손꼽히는 인문학자로 23년간 지켜온 교단을 떠났다.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정년퇴임했다.
시사영어사가 발간했던 월간지 편집장을 거쳐 동양통신의 외신부장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나 대학강단에 선 지 23년. 그에게 정년퇴임이란 물리적 구획말고는 큰 의미가 없는 듯하다.
정년이니 뭐니 의미부여 말라고 손사래부터 친다.
책읽기운동본부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도 교수의 휴대폰은 인터뷰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려댔다.
기적의 도서관사업과 문학 문화 강연 요청이 대부분이다.
오늘날 손꼽히는 인문학자의 자리를 차지한 도 교수지만 그의 의식 심연에 깃든 심리적 외상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6·25전쟁 중에 겪어야 했던 두 가지 죽음의 기억을 반추할 때면 그는 지금도 목울대가 잠기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첫 번째 죽음의 기억은 마산에서다.
피란시절 자신의 집 헛간에 한 청년이 묵었다.
누룽지 끓인 걸 나눠먹고 그 청년은 밤새 고통에 겨운 신음을 질렀다.
전시인 데다 조금 아픈 정도겠지 하다가 아침에 나가보니 그 청년은 이미 싸늘한 시체였다.
또하나 죽음의 기억은 겨울 부산에서다.
집앞 밭에 버려진 광주리 속에서 밤새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른들은 직감으로 누군가 아이를 버렸다는 걸 알았지만 애써 모른 체했고 걱정한 대로 그 아기는 아침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도 교수가 지금도 분노하는 절대 무기력의 상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그 심리적 외상은 그의 인문학 토양이 되기도 했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될,아니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했다.
고교시절 글쓰기를 좋아하고 그림에 소질이 있던 조숙한 이 '문학생도'는 툭하면 결석이었다.
비가 온다고 결석하고 바람만 불어도 학교를 빼먹기 일쑤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은 '내논 아이' 혹은 '결석대장'이었다.
하이데거 등 실존주의 철학자의 책을 의미도 모른 채 끼고 다녔단다.
완전한 자유인의 생활을 만끽하며 고교를 마친 그는 1년여를 소비한 후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에 입학한다.
그것도 입학시험을 거친 게 아니라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써준 추천장을 들이밀고 면접만으로 합격했다.
그 추천장의 내용은 '이 학생은 교보적(校寶的) 존재가 될 것을 보증한다'였다고 한다.
아무튼 학교의 보배로운 존재를 장담한 교장선생님의 안목이 틀린 게 아니었음은 오늘날의 도 교수가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남은 생이 10년뿐이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우문엔 "아무것도 안하고 푹 쉬고 싶다"는 현답이다.
그동안 등떠밀려 이런 저런 이야기며 글을 쓰고 사회운동하느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자신을 스스로 놔두기에는 살아온 관성이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며 신화와 문학 문화를 천착해 작품을 내보겠다는 의욕을 보인다.
책읽기로 인문학의 기초를 닦고 기본이 서는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고 있는 도 교수가 어린시절 올랐던 높은 곳에서 본 세상의 완결판일지도 모르겠다.
인문학의 가치와 교육 필요성을 담을 퇴임기념 강연은 8월로 잡고있다고 했다.
정용성 기자 herr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