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강제적 이타주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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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 서울대 교수 정치학 >
요즘 정치권 화두는 단연 양극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연설 이후 부유층과 빈곤층,대기업과 중소기업,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또 중산층의 붕괴현상도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정부측의 증세정당화의 일방적 논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증세는 없다'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세금올리기와 당장 손쉬운 증세방안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한 사회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할 때 그 원인을 건강한 사람들의 탓으로 돌려 그들로부터 돈을 강제로 거두어 병원을 많이 짓겠다는 발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양극화해소 쟁점의 본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유형의 이타주의를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즉 '강제적 이타주의'가 좋은가,아니면 '자발적 이타주의'가 좋은가.
사회안전망도 확충돼야 하고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중앙정부가 나서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만 해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이기주의만 있는 게 아니라 이타주의도 있다. 정부가 개입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두면 이타주의를 강제로 시행하는 셈이지만,이타주의는 반드시 증세방식을 통해서만 꽃피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고,아름다운 가게에 옷을 기증하며,꽃동네 무의탁노인들을 위해 자원봉사도 한다. 그런가 하면 노인과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교회도 있다. 대학에 거액을 기부한 김밥집 할머니도 있고 시간을 쪼개 고아원에 찾아가 아이들과 놀아주며 혹은 병원에서 호스피스로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자발적 이타주의'와 '강제적 이타주의'가운데 어떤 것이 바람직할까.
언론을 통해 고단한 삶에 허덕이고 있는 주인공이 소개되면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한다.
이 때 돈을 내는 사람이나 돈을 받는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금고지서를 받아보고 "내가 내는 세금이 불우이웃에 쓰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내는 사람이 있을까.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사람보다 은행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의 기분이 씁쓸하다면,강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강제적 이타주의'를 주문하기 보다는 '자발적 이타주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강제적 이타주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 대한 공격을 강화함으로써 불필요한 계층간 갈등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재원마련을 위해서는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계층을 압박하는 방안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 강제적 이타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로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복지혜택을 향유하려면 계속해서 가난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강제적 이타주의가 인기가 없는 것은 '유리알 지갑'을 가진 봉급쟁이가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세원 파악이 안되는 자영업자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고 복지재원의 염출을 논의하니 봉급자만 불만이다.
외국에서의 담세율이 한국보다 높다는 통계치만 말하지 말고 소득파악 인프라가 비교적 완비돼 투명한 세원 파악이 가능하다는 말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정부는 양극화해소의 방식으로 증세에 관한 여론몰이에 나서기 보다는 사람들 안에 내재하고 있는 자발적 이타주의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신빈곤층이 출현한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배려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배려는 부자들에 대한 적대적 화법이나 강제적인 증세정책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정심과 공감의식을 활성화시키는 방식에 의해 구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