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주 중국 남부 경제 도시들을 시찰했다.


1992년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를 연상시키는 행보다.


당시 덩이 선전 주하이 상하이를 돌며 정치적 각성과 경제 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 중국 사회가 열리고 경제가 성장하는 시발점이 됐다.


우리가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행보를 주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럽 경제계 인사 중 최고의 북한 전문가인 장자크 그로하 유럽상공회의소 소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지금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외환과 에너지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미 시장 경제 실험에 돌입했다"고 분석했다.


그로하 소장을 지난주 서울 광화문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북한의 경제 실험에 대해 들어봤다.


소장은 유럽상공회의소의 실질적인 업무 추진을 책임지는 상근직이다.


주한 유럽 기업인 중 2년마다 새로 뽑는 비상근직 회장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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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정지영 기자 ]


-유럽 기업인들과 함께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점에서 북한의 경제적 변화를 느끼는가.


"지난해 11월에도 유럽 기업인 60여명을 인솔해 북한에 갔었다.


지금의 북한은 수년 전의 북한이 아니다.


우선 곳곳에 시장이 개설됐다.


평양 통일시장에 가면 쌀부터 컴퓨터까지 없는 게 없다.


중국산 수입품이긴 하지만 심지어 오렌지와 바나나도 있다.


몇 년 전 까지만해도 전혀 볼 수 없었던 물건들이다.


최근에는 준(準·quasi)사영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준사영기업들은 수출이나 기타 영업을 통해 번 돈을 정부에 넘기기 전 일정 기간 보유하면서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


이 돈이 민간 부분으로 돌게 되면 초기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가 형성될 것이다."


-북한이 2002년부터 환율 개혁과 시장 설립 등 경제적 실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북한에서 실제로 경제 개혁이란 말을 쓰고 있는가.


"공식적으로는 안 쓰지만 개혁(reform)이란 표현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과거 사회주의 블록이 존재했을 때 북한은 자급자족하고 남은 잉여 생산물을 소련과 중국 등 이웃 사회주의 국가에 판매해 부족한 물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주의식 물물 교환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식량이 부족해 과거보다 다급해진 상황에 처해있다.


북한정권은 주민들을 먹여 살리려면 뭔가를 내다팔아 외화를 확보해야한다.


시장 경제 도입은 북한에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북한이 시장 경제 도입에 적극적인 의지가 있다고 보는가.


"어느 사회나 그렇듯 북한도 균질(homogeneous)한 사회가 아니다.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변화가 너무 빨리 오면 반드시 반작용으로 후퇴하는 기간이 따를 것이다.


경제 운용면에서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곳곳에 시장이 서고 난 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플레이션이다.


물건은 많지만 일반인들이 사기에는 너무 비싸다.


그래도 거래는 일어나고 있다.


북한이 어느 정도 시장 경제를 도입하는 것은 필연이지만 얼마나 빨리,멀리 갈 것인가는 누구도 모른다."


-북한 경제 개방의 최대 걸림돌은 무엇인가.


"최대 걸림돌은 에너지 부족이다.


시장 경제를 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장을 돌리고 상품을 유통시킬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원자로 건설이다.


그런 점에서 경수로 사업이 실패로 끝나 유감스럽다.


경제적 여력도 없거니와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 혼자서 북한에 전력망을 깔아 줄 수 없을 것이다.


통신 장비를 들여가는 데도 미국의 허가를 받는 데 2년이나 걸리지 않았나.


경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지도력이 부족한 것도 또 다른 문제다."


-미국 금융 제재의 여파가 느껴지는가.


"북한에서는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다.


북한은 직접 은행을 개설하지 않기 때문에 외국에 있는 은행들을 중개 은행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수입과 수출이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미국의 감시 리스트에 올라있지 않은 은행을 중심으로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북한이 지하자원 수출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들었다.


유럽 기업들 중 투자 의향을 가진 곳이 있는가.


"북한이 내다 팔 수 있는 것은 지하자원 밖에 없다.


하지만 장비와 시설이 너무 낡았다.


북한은 현재 중국에서 장비를 들여다 광물을 채굴한 후 이를 중국에 주고 식량을 사온다.


하지만 장비 수입 비용이 비싸 북한 입장에선 채산성이 안 맞는 장사다.


중국만 돈을 벌어갈 뿐이다.


하지만 대북 투자에 따른 리스크를 감수할만한 나라가 현재로서는 중국 밖에 없다.


기업들은 체제를 따지지 않고 비교우위가 있는 곳에 투자하지만 북한은 투자를 보호해줄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고 에너지 부족에 따라 전력 공급과 운송망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다."


-유럽 기업들의 대북 투자나 교역 현황은 어떠한가.


"교역은 다품종 소량체제다.


북한은 유럽산 약품과 소비재 등을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의 유럽 기업 지사를 통해 간헐적으로 수입해간다.


특히 그들은 유럽산 위스키와 코냑을 좋아한다.


영국 법률회사 칼브&어소시에이츠 등 북한에 지사를 개설한 유럽 기업이 몇 몇 있지만 시설 투자를 한 곳은 하나도 없다.


ING가 10년 전 나진 선봉 지구에 지점을 개설한 적이 있다.


믿을만하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진 첫 외국계 은행이어서 관심을 모았는데 나진 선봉 지구가 사실상 불발로 끝나면서 3년 만에 철수했다.


이후 유럽 기업들은 지점을 만들어도 초기 시장조사와 중개 정도만을 할 뿐 고정 투자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한국이 대북관계나 한반도 평화정착에 있어서 미국이나 기타 다른 나라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한국과 북한은 한반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6자 회담 당사국들도 그들의 국익을 우선시할 뿐이다.


나는 햇볕정책과 경협을 강력히 지지한다.


특히 개성공단은 북한과 한국 모두에게 윈윈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성공 케이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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