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내다. 선친은 쉰이 넘은 나이에 나를 낳았다. 꽤나 늦둥이였던 셈이다. 위로 나이 많은 형들과 누나가 있는데 내 것을 찾고 지키려다 보니 자연히 극단적인 말법과 행동을 무기처럼 사용했다. 그리고 늘 조건을 내걸었다. "심부름 해주면 뭐 해 줄 건데?" "장난감 안 사주면 밥 안 먹어." "돈 안 주면 학교 안 가." "1등 하면 뭐 사줄래?" 형들과는 달리 나는 부모한테 뺨 한 번 맞지 않고 자랐다. 부모가 애지중지하는데 형제들이 나를 건드릴 리 없었다. 나는 자라는 내내 독불장군이었다. 버르장머리 없기로 나를 당할 사람이 없었고,심할 때는 13년이나 연상인 누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주먹질도 했다. 그래도 나무라거나 벌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열살 어름이었을까. 라면이 뭔지 모르시던 외할머니가 스프 대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라면을 끓여줬다고 그릇째로 꽃밭에 엎고 그것도 모자라 분이 풀릴 때까지 발로 지근지근 밟아버린 일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가슴 아프다. 성정이 부처 같았던 우리 외할머니는 늦둥이 외손자의 망나니 같은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에 섞어 꼭 한 마디를 하셨다. "원 그놈의 성질도." 마구잡이식 내 성질머리는 20대 후반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연애를 할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갈등과 마찰이 생길 때마다 나는 항상 극단적이었다. 비싼 옷을 입었다고,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이 암울한 시대에 어떻게 조용필 노래 따위를 좋아할 수 있느냐고 언쟁을 벌이면 마지막에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매번 "그럼 좋아,헤어져!"였다. 시작은 사소하고 미약했지만 나중은 늘 창대해졌다. 남녀관계에서 헤어지자는 선언보다 더 극단적인 말은 없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한 번쯤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게 헤어지자는 선언이니 어떤 여자가 그 꼴을 참아줄 수 있으랴.당연히 나는 여러 여자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버림을 받았다. 그래도 내가 잘못된 줄을 까맣게 몰랐다. 스스로 잘못임을 깨닫기 시작한 건 소설을 쓰면서부터다. 직업상 여러 사람의 캐릭터를 관찰하고 연구하다 보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그제야 거울에 비친 내 진면목에 경악했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고 극단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습관이다. 오래 묵은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지만 스스로 잘못됐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뜯어고칠 수도 있다. 사람의 캐릭터를 연구하면서 보니 대개 나처럼 응석받이로 자란 집안의 막내나 늦둥이들이 극단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근년에 우리사회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건 국가 지도자들의 극단적인 사고나 말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과거처럼 흑백이 명확한 양극사회가 아니다. 옳은 가치가 어느 한 쪽에만 있지도 않고,갈등의 근원을 시비(是非)로 가릴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양한 가치들이 범람하는 이 형형색색의 사회에서 반드시 나만 옳다고 고집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자신의 말과 뜻이 통하지 않으면 그만두겠다,죽겠다,탈당하겠다고 응석들만 부리니 국민이 보기에 여간 딱하고 한심한 게 아니다. 우리집 맏형은 하루종일 같이 있어 봐야 한두 마디 할까말까 하는 과묵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응석을 부릴 때마다 그저 허허 웃기만 한다. 그래도 그에겐 집안 전체를 복종시키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 그의 권위는 대부분 침묵과 행동에서 나온다. 새해엔 우리 맏형 같은 국가 지도자를 많이 보고 싶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