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 본사 주필 > 한가닥 희망마저 무너지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무척 허탈하게 마련이다. 10일 조사결과가 최종발표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신물이 나도록 토론하고 욕을 해댔지만 그래도 '원천기술은 가지고 있다'는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이 우리 모두의 마지막 기대였다면 너무 순진한 감정이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잘나가던 한 사람의 과학자가 이토록 허망하게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현실을 반추하게 된다. "정초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고 혼란스럽지.좀 피곤하지 않고 조용하게 지낼 수는 없을까?" 요즈음 보통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왜 그런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야당은 국회를 떠나 길거리로 나선지 이미 오래고,여당은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당내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싫다는,특히 지원세력인 여당까지 반대하는 사람을 오기(傲氣) 부리듯 장관에 내정하더니 이제는 키워야 할 재목이라서 경험을 쌓도록 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인사라고 참모의 입을 통해 공개적으로 해명하고 나섰다. 장관 자리가 정치인 경험 쌓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아무나 키운다고 대들보가 되는가. 시중에서 설왕설래했던 대로 여당 대선구도의 예비조작이었단 말인가. 더구나 이제 모든 요직 인사는 권력게임의 방편으로 이용된다고 믿게 됐으니 정말 큰일 아닌가. 요즈음의 정치 상황을 두고 누군가 '활극'(活劇)이라고 묘사했다. '치고 받는 난투장면이 많은 영화나 연극'을 활극이라 했던가. 무릎을 칠 만한 표현이다. 여당과 야당은 물론 청와대까지 국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있을까. 정치란 원래 자신들의 이득을 얻기 위한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싫어도 보고 들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참담한 심정을 조금은 이해해야 옳다.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틈만 나면 국민의 대표라고 목에 힘주는 국회나 정당 책임자들이라면,이 정도의 국민에 대한 예의는 갖출 줄 알아야 한다. 정치학 원론(金雲泰 저,박영사 1991)에 나와 있는 리더십의 정의를 살펴보자. "리더십은 집단의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영향력으로서, 그 영향관계의 특징은 추종자가 지도자의 지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같은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상호협력토록 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리더십의 개념은 실력적 강제관계인 '지배'나, 또는 단순한 계층질서 내의 직위에 상응하는 개념으로서의 '권력' '명령' '직권력' 등과도 상이한 것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이를 적용한 리더십을 점수로 환산해 본다면 과연 몇 점이나 나올까. 상식이 통하는 사회,보편타당한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이것을 성숙한 시민사회라고 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요직인사나 정책의 변화가 나올 때면 너 나 할 것 없이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의도나 배경부터 유추해 보는 것이 습관처럼 돼있는 게 우리 백성들이다. 지도자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밝힌대로 믿으면 결국에 바보가 되고 마니까. 황 교수를 망가뜨린 것도 연구의 실패가 아니라 정치지도자들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각 정당이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그를 영입하려 했었다는 소문이 진실이 아니기만 바랄 뿐이다. 정치적 리더십은 정치활극의 싸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이 뭔가. 좀 조용하게 살고 싶다. 정치인들의 웃음 있는 연극을 보면서.비록 그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