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10시께 서울 을지로입구 사거리.소공동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 주변은 장식용 조명등이 가로수와 건물 벽면을 뒤덮은 채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연말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로맨틱한 감정은 불과 1분 이상 가지 못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기위해 을지로입구 지하통로에 들어서자 방금 전 지상과는 전혀 딴 세상이 펼쳐졌다. 족히 50∼60명은 넘어 보이는 노숙자들이 라면 등 다양한 상품명이 새겨진 판지들로 보금자리를 꾸미느라 분주했다. 을지로입구역 지하광장의 구석 대부분은 이미 다른 노숙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노숙 1년차 김정환씨(가명·65)는 "지금 여기에 있는 노숙자들의 상당수는 어떻게 보면 국가정책의 희생물들이다. 카드빚은 쌓여가는데 일자리는 없고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정치인 등) 누구처럼 도둑질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치과 기공사,중국집 주방장 등을 지냈다는 김씨는 "외환위기로 일하던 중국집이 문을 닫은 후 줄곧 실업자 신세였다"며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김씨는 그래도 자신은 나은 편이라고 했다. "어제 오늘 연속 노가다(건설현장 막일)를 했어요. 나는 그나마 일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죠." 실제 그가 신고 있는 등산화는 허연 돌가루 범벅이었다. "일자리가 생긴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노숙자 중 몇명이나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절반도 안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재활 프로그램 없이 사회단체 등에서 먹거리와 함께 매일 1000∼2000원씩 나눠주고 있는데 이것이 이들을 노숙자로 계속 머물게 하고 있다고도 했다. 고소득층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고 연말 성과급에다 주가상승 효과까지 더해져 '연말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밤만 되면 롯데백화점으로 통하는 을지로입구 지하광장에 몰려드는 노숙자들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묘안을 기대해 본다. 김철수 사회부 기자 kc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