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 한국이 WTO 회원국들과 타결한 쌀협상이 국회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국회 농민 정부가 머리를 맞대는 3자기구를 구성해야 한다"며 회의장을 점거하고 논의를 거부하고 있는 국회의원들,그들은 도대체 지금까지는 어디에 있었는가? 지금 국회는 2004년 4월 총선에서 탄생했고,쌀협상은 2004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국회는 그들의 입장을 개진하고 전달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 많은 세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면합의 의혹으로 금년 5∼6월 국정조사가 실시됐고,야당은 이면합의라는 주장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이미 파헤칠 것은 다 파헤쳤고,정부가 쌀협상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여러 정책수단을 강구하고 수용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비준 지연은 정치 쇼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국회비준이 지연될수록 농업계의 요구는 증대하고 정치권은 이를 확대생산하고 정부는 결국 수용했던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과정을 답습할 요량인가. 이런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2004년까지 쌀의 관세화가 연기되고,2004년 이후 쌀의 관세화 유예 연장 여부는 2004년에 진행되는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는 합의는 정부당국자 입장에서 보면 '뜨거운 감자'였던 쌀의 관세화 문제를 최대한 연기한 것이다. 10년 후 다시 한번 쌀 관세화 논쟁의 소용돌이에 국력이 소모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심각하다. 쌀 관세화 문제가 대통령직을 걸 만큼 한국으로선 상징적 문제였다면 2004년 이전에 같은 문제를 두고 다시 한번 국내적인 논쟁을 벌여야 하는 사태는 미리 피해야만 했었다. 2004년 이후 쌀의 관세화 유예에 대한 협상 가능성을 열어 둔 건 농민과 관련단체에 쌀의 관세화를 지연시킬수 있다는 과잉기대를 부추기게 되고,쌀개방과 개방 반대로 편가르기 속에 또다시 구조조정과 개혁이 표류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비전략적이고 단기적인 협상전략이었다"고 필자는 1999년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다. 지금 우리가 지불하고 있는 막대한 재협상의 기회비용을 생각해보라.쌀협상 준비와 협상기간,그리고 비준에 이르는 최소한 3년 이상의 세월 동안 관련 공무원조직(농림부,통상교섭본부)이 이 문제에만 매달려 있고,국회 역시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 여당이 당론으로 비준동의안 통과를 결정한다고 해도,여당 소속의원의 그간의 행태로 미루어 볼 때,얼마나 많은 이탈표가 나올지 모른다(2004년 2월 한ㆍ칠레 FTA 표결 때,47석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당은 찬성이라는 당론에도 불구하고, 불과 11표만 찬성을 던졌었다).통외통위 소속 민노당 의원은 고작 1명임에도 수개월 간 비준 동의를 지연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국회 제 1,2당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들과 민노당 간의 타협이 끝내 불가능하면 결국은 표결처리로 갈 수밖에 없음에도,국회의장은 직권상정을 거부하고 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하지만 쌀협상 비준동의안에 대한 모든 비난의 화살이 국회에만 쏠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정부가 국회를 향해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만,매번 외국과 통상협상을 다 끝내고 국회에 비준안을 던지면서,비준을 안 해주면 국가신인도가 손상된다는 으름장은 볼성 사납다.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정치제도에서 이제 통상협상을 과거와 같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할 시점이 됐다. 협상의제 선정 초기부터 국회가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는 상설협의체 구성이 필요한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그것으로 국내협상절차가 복잡해지고 협상 초기부터 이익집단의 정치공세가 거세지는 일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비준의 정치경제학을 답습하기에는 너무 화가 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