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축구팬, 질 때도 박수치는 연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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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산 < 소설가 >
본프레레 감독에겐 전술이 없다고 사람들은 비난했다.
상대의 전술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선수교체 시기도 문제가 되곤 했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쏟아진 혐의들을 부인했다.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아직 과정에 있다는 거였다.
모든 시계는 월드컵 본선에 맞춰져 있으니 그때까지 믿고 지켜봐 달라는 주장이었다.
본프레레 감독을 경질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서 대표팀을 이끄는 감독이 일반 관중들도 다 아는 전술을 몰랐다고 보지는 않는다.
선수교체도 마찬가지다.
관중들이 보기에 상태가 안 좋은 선수가 감독 눈에 좋아 보일 리 없다.
그러고도 교체하지 않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본프레레 감독은 전문가다.
축구협회 기술위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같은 비전문가는 설령 감독의 경기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판할 수는 있어도 불만을 표현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이번처럼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경질까지 시켜버리는 건 도를 넘어선 월권이자 오만이다.
감독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아직 과정에 있고,앞으로 선수들을 조련할 방법과 계획이 있으며,내년 본선에서 기필코 좋은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수없이 호소했다.
계약할 당시 특명 가운데 하나였던 월드컵 본선 진출도 지난 6월 쿠웨이트 원정 경기에서 홈팀을 4-0으로 대파하며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안심한 그는 동아시아대회쯤은 연습경기라고 여긴 모양이다.
한국 축구 팬들이 연습경기의 내용과 결과를 가지고 그토록 가혹하게 다그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십중팔구 그도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번 소동을 겪으며 또 하나 무서운 것은 우리사회의 여론형성 과정이다.
화장실 낙서 같은 황색언론과 인터넷을 점령한 정체불명의 네티즌들이 결탁하면 어떤 문제에서든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하는 게 요즘의 걱정스러운 세태다.
익명 뒤에 숨어 무책임한 글들을 남발하다가도 사정이 불리하면 유령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들이 지금 우리사회의 여론을 주도한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또 약방에 감초처럼 정치인이 가세해 축구협회에 대한 국정감사를 요구하고 나선다.
대관절 축구와 국정이 무슨 상관인가? 세금 운운은 명분을 위한 명분임을 누구나 다 안다.
밥내만 맡으면 숟가락을 들고 뛰어오는 얄팍한 포퓰리즘 정치는 근년에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정말 신물이 난다.
2002년 4강 신화에 이어 우리는 이번에 월드컵 본선 6회 연속 진출이라는 자랑거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런 나라는 세계를 통틀어 8개국뿐이고 아시아에선 우리가 유일하다.
이런 성과들이 신화가 아니라 진정한 실력이 되려면 축구를 관전하는 팬들의 의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여유 있게 게임을 즐기는 태도,승패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않고 상대팀이라도 훌륭한 플레이를 보이면 박수를 쳐주는 너그러움,졌을 때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성숙한 자세 없이는 우리 축구문화의 근본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경기마다 과도하게 일희일비하는 우리 팬의 수준은 세계 몇 위쯤 될까?
선수와 감독이 아니라 이젠 국민과 팬이 달라져야 할 차례다.
협회든 감독이든 임기가 정해지면 믿고 맡겨둬야지 중간에 자꾸 흔들어서 일을 아예 그만두도록 만들어선 안 된다.
더 잘하라는 비판과 훈수도 정작 일을 맡은 사람의 고충을 감안하면 정도껏 해야 옳다.
축구대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열릴 것이고,그 수많은 시합에서 한국 선수들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을 것이다.
국민과 팬들은 질 때를 위한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