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퍼니 '블랙'에 대한 실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요?"(A그룹 임원) "생각만큼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레드' 사업부 만큼은 수익성과 전망이 밝더군요. '추진'해도 될 것 같습니다."(B로펌 변호사) 초대형 기업 인수·합병(M&A)을 추진하고 있는 B로펌의 담당 변호사들은 인수를 의뢰한 기업의 이름을 '화이트'로,인수 대상 기업의 이름을 '블랙'으로 부른다. 회사를 짐작할 수 있는 주요 용어와 명칭을 고유명사 대신 대명사나 자신들만 알수 있는 암호로 바꾼 것. 이들이 이런 암호를 만든 건 "기밀이 새 나가는 즉시 M&A가 깨질 수 있으니 최대한 보안을 유지해달라"는 A그룹의 요청 때문이다. A그룹은 "사무실이나 회의실 뿐 아니라 식당과 술집에서도 예외없이 암호를 사용해 달라"고 신신당부해둔 상태다. 최근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간단한 서류 전달과 의견 교환도 반드시 직접 만나서 주고받자"는 요청이 추가됐다.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을 계기로 기업들이 사내 보안 시스템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자료 유출을 막기 위해 메신저와 웹하드에 이어 USB메모리까지 사용을 금지시키는가 하면,임원 집무실과 회의실을 대상으로 도청 방지 장치도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이 참에 철통 보안 체제를 갖춰 기승을 부리는 산업스파이 활동까지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에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안기부 불법도청 사태 이후로 음악을 틀어놓고 회의하는 사례까지 생기는 등 보안에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며 "정보 유출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일단 메신저와 웹하드에 이어 조만간 USB메모리 사용도 금지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서울 양재동 본사에 근무하는 과장급 이상 임직원을 불러모아 보안 관련 '정신교육'을 했다. 외부 보안전문가(박태완 한국정보보호학회 이사)까지 초청,'보안이 기업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자리였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삼성그룹은 올초 제일기획 에스원 등 18개 계열사 인트라넷에 일제히 파수닷컴의 웹 보안솔루션인 'FSW'를 깔았다. 이 시스템은 웹 상의 모든 정보를 암호화하기 때문에 정보유출을 원천 봉쇄한다고 삼성은 밝혔다. 아울러 메신저와 USB 사용도 금지시켰고 중요 문서는 반드시 만나서 전달하도록 하고 있다. LG그룹은 최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를 시작으로 전 사업장에 대한 도청 여부 점검에 들어간데 이어 앞으로 전 임원과 주요 회의실에 대한 도청 테스트 주기를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SK그룹의 경우 연구원이라도 자신이 소속된 연구실만 출입할 수 있는 출입통제 시스템을 최근 마련했으며,GM대우는 아예 보안 전담 임원을 선임하는 동시에 미국 GM본사의 보안 고문까지 데리고 왔다. 재계 관계자는 "안기부 불법 도청 파문으로 보안이 기업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핵심 현안으로 떠오른 상태"라며 "상당수 기업들이 이 기회에 산업스파이까지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철통같은 보안시스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오상헌·임원기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