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병 일 < 이화여대 교수 > 가뜩이나 무더운 여름에 안기부 도청 파문이 우리를 더욱 짜증스럽고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불법도청이 국가기관에 의해 버젓이 자행됐다는 기만,비밀유지를 목숨만큼 소중히 여겨야 할 안기부 직원이 상업적 이익과 그 비밀을 맞바꾸려 했다는 후안무치,불법도청 테이프를 돈으로 사면서까지 취재하려 했다는 일탈된 저널리즘,무수한 테이프 가운데 왜 유독 특정기업 특정정치인 것만이 유출 대상이 됐을까 하는 의혹,여태껏 보도유보 입장을 견지해 오던 방송국이 왜 하필 지금 터뜨리게 됐을까 등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들은 국민의 알 권리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더 큰 공익이라는 주장 앞에 무색해진다. 과연 그러한가? 국민의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혹시 우리는 더 큰 집단적 폭압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내용도 공개할 수 있다면,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누가 보호해 준다는 말인가. 질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사회적 혜택과 비용의 차이를 따져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X-파일에 적용돼야 한다면,원자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 건립,농산물시장 개방,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등 왜 다른 정치경제적 논란거리에는 그런 잣대가 무시되고 있는지 그 사회적 심리의 이중구조가 의아스럽다. 여당과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이번 파문을 계기로 더욱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그 재벌개혁이 기업의 가치를 최대화한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이들이 이야기하는 재벌개혁은 주류경제학에서 그 효과를 의문시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지배구조 개편 등이다. 신기술의 출현과 시장상황의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통제불가능한 불확실성 속에 글로벌 경쟁을 해야 하는 기업을 그 규모로 통제하겠다는 행정편의적 구태의연한 발상,기업마다의 독특한 문화ㆍ역사적 발전경로를 무시한 채 모든 기업에 일률적인 지배구조를 강요하는 지적인 오만함은 이념에 경도된 '재벌 손보기'지 결코 '재벌 개혁'이 될 수 없다. 이번 X-파일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은,정권을 잡으면 괘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업을 망하게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대통령제 아래에서 정경유착의 검은 유혹은 항상 정치권에서 제공하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진정으로 재벌개혁을 원한다면 탁월한 경영능력도 없고 우수한 기술력도 없이 오로지 로비능력만으로 살아남았던 재벌들을 퇴출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그러기 위해서는 10여년째 소리만 요란한 규제완화가 실질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규제완화를 위해선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이 선행돼야 하고,일자리를 얼마나 더 많이 만들어내고 세금을 국가와 지방정부에 얼마나 더 많이 냈는가로 기업의 사회적 평가가 이뤄질 만큼 국민의식이 성숙돼야 한다. 재벌이란 양면의 칼날과도 같은 존재이다. 한국의 집권세력이 재벌의 칼날에 손이 베일 것을 무서워해서 그 칼을 버리고 싶어하는 반면,외국기업들은 자기들을 겨냥한 그 칼날의 날카로움을 두려워 해서 칼을 버리라고 소리친다. 우리 스스로 칼을 잘 다룰 수 있는 법을 체득하면 되는데,왜 그 칼을 버리려고 하는가.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서구의 200년 산업화를 30년 만에 따라잡은 한국의 기적적인 산업화는 한국적인 기업경영과 정부정책의 합작품이라는 것이 학계의 연구결과인데,산업화의 그림자만 보고 경쟁에서 낙오되고 소외된 계층만을 의식해서 황금알을 낳아 온 거위를 잡아먹자는 식은 곤란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