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그룹과 중앙일간지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이른바 `X파일'에 연루된 인물의 신병이 확보되고 비밀도청 책임자가 과거 자신의 행적을 자세히 적은 자술서를 공개해 국정원의 X파일 진상규명 노력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국정원은 26일 오전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출국수속을 밟던 재미교포 박모씨에게 X파일과 관련해 출국정지된 사실을 알려주면서 동행 협조를 요청해 모처로 데려가 조사하고 있다. 박씨는 X파일이 담긴 도청 테이프를 전직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입수해 MBC측에 넘겨준 인물로 지목돼 출국정지 조치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공항 관계자가 전했다. 국정원은 김영삼 정부 시절 각계 요인들에 대한 도청임무를 전담했던 안기부의 비밀조직 `미림'의 팀장이었던 공운영씨가 26일 공개한 자술서에 등장하는 박씨라는 인물과 재미교포 박씨가 동일인물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공씨는 자술서에서 김대중 정부 들어 직권면직될 당시 함께 퇴직한 A씨로부터 박씨를 소개받아 "삼성관련 사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삼성에 약점이 될 만한 도청자료를 건네줬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씨는 박씨가 삼성 관계자와 만나 모종의 협상을 하다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 자료를 돌려받아 보관하던 중 국정원 감찰실 직원들이 찾아와 보관 문건을 반납해달라고 요청해 테이프 200여개와 문건을 되돌려주었다고 덧붙였다. 국정원은 자술서에 등장하는 박씨와 이날 출국정지된 박씨가 동일인물인지를 파악해 같은 인물로 드러나면 X파일과 관련해 공씨가 밝힌 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정원은 또 자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X파일이 공개되는 과정에 재미교포 박씨가 주도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삼성그룹의 누구와 만나 어떤 제의를 했으며 그 이후 언론에 도청자료를 왜 건네줬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국정원은 재미교포 박씨가 조사에 적극 협조한다면 X파일을 둘러싼 온갖 의혹들을 의외로 쉽게 규명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박씨가 미국시민권자 신분이기 때문에 조사에 선뜻 응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데다 최악의 경우 공씨와 대질조사를 해야하는데 자해소동을 벌인 공씨가 협조해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씨의 경우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공소시효가 지나 사법처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국정원 조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은 X파일 제작 및 공개 과정에 대한 조사와 별도로 공씨의 진술서에 나타난 200여개 도청 테이프 및 문건의 반납 부분도 조사해 이들 자료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도 확인할 계획이다. 결국 국정원의 X파일 진상조사의 성패는 이날 공항에서 신병이 확보된 재미교포 박씨와 미림팀장인 공씨의 협조 여부에 달려 있는 셈이어서 향후 이들의 입이 X파일 의 비밀을 풀 열쇠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영종도=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z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