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학과를 나왔다지만 통역사보다 러시아어 잘해? 희영씨가 갖고 있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중소 해운업체인 한로해운에 다니는 정희영씨(27).


선문대 러시아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외국어대에서 러시아학 석사까지 받은 그녀가 이렇게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자존심 상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2003년 가을.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한화그룹의 '백수 기(氣) 살리기'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6년 동안 러시아학을 공부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취직에 도움이 될 말한 '무기'는 하나도 안 갖고 있었어요.


일단 눈을 낮춰 어디든 취직해 일을 배우자고 결심했죠."


한화그룹이 취업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는 구직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한 백수 기 살리기 프로그램 2기 참가자인 정씨.대학원 마지막 학기였던 2003년 가을,논문을 미루고 취업에 나섰지만 낙방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대학원생인데'라는 생각에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회사에만 지원한 게 패인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고 싶어 지원한 백수 기 살리기 프로그램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자꾸 입으려고 했던 게 문제였어요.


자기한테 맞는 옷을 찾으면 얼마든지 널려 있는데요.


눈을 낮춰 한 중소 포워딩 업체에 취직했죠.연봉 1800만원이라니 남들은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하나 하나 일을 배워가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지금은 한로해운으로 자리를 옮겨 몇 개월 일했는데 아직도 배워야 할 게 태산이에요."


한화 프로그램이 정씨에게 가르쳐준 것은 자존심을 죽여 눈을 낮추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배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 극기훈련,카메라로 나쁜 버릇을 샅샅이 찍어 지적해주는 면접 체험 등 고단한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나니 자신감이 솟구쳤다.


"무엇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게 힘을 북돋워주었어요.


모두 절박한 심정으로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죠.서로 격려하고 이력서 작성이나 면접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면서 어느새 베스트 프렌드가 돼 버렸어요."


정씨가 한화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보석은 직업관."재능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일을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한 선배의 충고는 고단한 사회생활의 '일용할 양식'이 됐다.


"지금 회사에 무척 만족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아직 취업 전선에서 고생하는 후배들도 눈을 크게 떴으면 좋겠어요.


시야를 넓혀서 찾아 보면 나를 필요로 하고 나도 즐겁게 일할 만한 회사는 얼마든지 있더라고요."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