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가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백제)과 신라(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광개토왕비문(414년 건립) 중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조 기록이 이 비를 처음 발견한 일제에 의해 조작됐다는 소위 '신묘년조 비문 변조설'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신념'들이 대체로 자리잡고 있다. 첫째, 광개토왕비문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담고 있다. 둘째,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함께 한민족 고대 왕조 국가이다. 나아가 여타 기록을 보강해 당시 동북아 국제질서로 보아 백제와 신라가 왜의 신민이기는커녕, 오히려 왜가 한반도 식민지였다는 주장까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제기된 이런 변조설에서 특이한 점은 왜가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비문 기록은 터무니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위에서 군림했다는 증거로는 이 비문을 가장 중요하게 거론한다는 점이다. 신묘년 조 조작설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이면에는 이 비문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일본 제국과 그 역사학자들이 마침내 신공황후(神功皇后)에 의한 신라 정벌과 임나일본부 건설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됐다"고 광분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서예가인 김병기(51) 전북대 중문과 교수가 최근 펴낸 단행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학고재)는 부제 '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왕비의 진실'이 명시하듯이 이러한 신념들에 투철하게 입각한 또 다른 신묘년 조 비문 조작설을 주장한다. 김 교수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고구려) 속민으로 줄곧 조공을 해 왔으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중에서도 '渡海破'는 '入貢于'(입공우. 들어와서 ~에게 조공했다는 뜻)가 변조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 식 판독에 의하면 신묘년 조는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고구려) 속민으로 줄곧 조공을 해 왔으나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예사적인 측면에서 김 교수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 이번 책은 이미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확대 보강한 것이다. 발표회 당시에도 그랬듯이 이번 책에서도 여전히 그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한 증거물들이 그다지 설득력이 높다고는 하기 힘들다. 이번 책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그 부왕(父王)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치장하기 위한 고구려의 일방적 기념비인 비문 자체가 외려 당시 역사를 오도하고 호도할 수 있다는 의심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판독이야 어떻든 저자가 비문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전하는 '텍스트'로 간주하고 있음을 엿보이는 대목이다.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내용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역사적 사실과 동의어가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기념비는 왜곡과 과장과 축소로 얼룩지기 마련이다. 나아가 이 비문 중 신묘년 조를 변조했다는 주장 또한 당시 이에 대한 일본의 반응으로 볼 때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비문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이 확인되었다고 일본학계가 반색하기는커녕 심지어 "자랑스런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가 확인됐다"는 비탄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본 동양사학의 거두인 당시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이 비문을 일본으로 옮겨 전시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우리의 패배를 일본 국민들에게 각성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즉, 신묘년 조에 의하면 왜가 설혹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하나, 결국은 고구려에 박살이 나서 조선반도에서 쫓겨난 역사가 기록돼 있는데 이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까지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시라토리 류의 주장을 중시하고, 김 교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비문 조작이 정말로 있었다고 한다면, 일본은 자기들이 비문을 조작해 놓고, 그 조작된 비문 내용에 분개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재일교포인 일본 와세다대 이성시 교수가 갈파했듯이 이제 광개토왕 비문을 둘러싼 근대 국민국가의 과거를 지배하기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 '고구려에 의한, 고구려를 위한, 고구려의 일방적 기념비'로 환원해야 할 것이다. 290쪽. 1만2천원.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