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것은 판도라 상자였다. 온갖 혼선과 갈등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하나는 불가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상(理想)은 벽에 부딪치고 깃발은 빛이 바랬다. 동북아 중심국은 북핵(北核)과 동북공정에 포위당했고 계급 정책은 용도폐기 상태다. 개혁은 딱하게도 '이른바'라는 수식어를 지금껏 달고 있다. 명분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팔아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 그룹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수구를 몰아내면 때로 수구보다 더 간특한-그리고 대부분은 무능한-집단들이 발밑을 파고드는 법이다. 청와대 주변에는 지금도 '소위 정책기획가'들이 너무 많다.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없어 나라가 잘못된 적은 없다. 참여정부 2년을 폄훼할 생각도 없다. 비난 역시 접어둘 생각이다. 다만 흘려 보낸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대기업 노조의 파행을 채용비리가 터지기 전에는 몰랐다는 말이며 김진표씨를 교육부총리로 기용해야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평등교육이 어떤 파행상이었는지를 정녕 몰랐다는 말인지. 돌아보면 허송의 세월이요,거꾸로 돌린 시계지만 이것으로서 학습기간은 끝난 것일까. 불행히도 답은 유보다. 참여 간판을 허공에 달고 있는 동안은 단식으로 버티면 목적을 달성하는 따위의 일들이 이름과 슬로건을 무엇으로 바꾸든 되풀이 될 것도 뻔하다. 국가 의사결정을 리비히의 법칙,다시 말해 최저한에서 결정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국가의 역량을 낙오자를 보살피는 데만 투입해도 되는 그런 수준이 되려면 국민소득이 당장 3만달러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산술 평균(단순여론)으로 국가의사를 결정하기에는 사태가 너무도 복잡하며 경제적 의사결정이란 또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가. 돌아보면 개혁의 2년이 아니라 퇴행의 2년이었다. IMF 사태 이후 소위 한쪽의 신자유주의 과잉이 반대편의 과잉을 불렀을 뿐이라면 그 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은 대중정치였다. 개혁은 갑갑한 것이고 당연히 입에 쓴 약과 같다. 희망을 부풀리고 슬로건을 내걸어 꿀물을 먹이는 것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그것으로는 설탕조차 줄 수 없다. IMF 개혁 과잉에 카운터를 날린 이것에 우리는 개혁 아닌 퇴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마땅하다. 그래서 양 극단이 정치를 휘두른 결과 중심은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은행장을 모두 씨티은행 출신으로 갈아치우는 것이 잘못이라고 해서 코드 대학교수들을 사외이사라는 이름으로 은행에 밀어넣는다고 금융이 잘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개인의 자유,기업의 자유,경제의 자유를 신장해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것은 사이비다. 말도 많은 유신의 깃발이 오른 것이 왜 73년이었던가를 거듭 숙고하지 못하면서 오늘의 경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재와 개발의 모순조차 껴안지 못하면서 복지와 분배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면 역시 뜬 구호다. 한낱 돈을 찍어 나눠주는 방법으로 가난을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 모순은 분리불가능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근대 1백년을 오욕의 역사(일제)요,굴종의 역사(유신)요,오류의 역사(재벌)였다고 정리한다면 아직은 '모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복수심과 치기에 들뜬 청년의 열정일 뿐이다. 정부는 언제쯤 막다른 골목에서 되돌아 나올 것인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