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기업인으로 주목받아온 칼리 피오리나 휴렛팩커드(HP)회장(50)은 결국 '컴팩'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전격 경질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는 지난 2002년 법정소송까지 가는 이사회의 극심한 반대속에서도 경쟁사인 컴팩의 인수를 강행, 일약 스타 경영인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합병후 약속했던 실적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면서 이사회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축출되는 신세가 됐다. ◆컴팩 인수가 끝내 '발목' 잡아=피오리나는 지난 1999년 보수적인 경영으로 유명한 HP에 최초의 여성이자 외부 영입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되면서 회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여년간 줄곧 AT&T,루슨트 테크놀로지 등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피오리나는 HP로 옮긴 초기에 방만한 사업부문을 집중화하는 등 HP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2002년 컴팩 인수를 강행하면서 이사회와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HP 공동 창립자 윌리엄 휴렛의 아들인 월터 휴렛 이사와는 정면 대결을 벌여 그를 이사회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당시 피오리나는 컴팩 인수로 컴퓨터 시장에서 1위 자리를 고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PC 부문의 영업이익이 2004년 전체 매출의 3%를 차지하고,프린터 부문의 이익도 11∼13%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수익성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HP의 지난해 순이익은 35억달러로 피오리나가 CEO로 선임될 당시인 34억9천만달러와 엇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 PC 부문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매출의 1%도 안됐다. 급기야 PC 시장점유율에서 경쟁사인 델에 1위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특히 분기 실적이 월가의 예상치를 빗나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피오리나 재임기간 중 50%나 떨어진 주가 때문에 손해를 입은 월가의 기관투자가들은 피오리나를 '능력없는 경영인'으로 혹평하기 시작했고 이사회는 끝내 그를 축출했다. ◆월가는 대환영=월가는 피오리나 사임 소식을 쌍수 들어 환영했다. HP 주가는 9일 피오리나가 물러날 경우 프린터 부문의 분사 등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6.9%나 급등했다. 메릴린치도 이날 HP의 투자의견을 '중립'에서 '매수'로 상향 조정한다고 밝혔다. 메릴린치는 새로운 CEO가 선출될 경우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업분할 압력 커질 듯=HP이사회는 피오리나의 사임 발표와 동시에 "사내외에서 새로운 CEO를 물색하고 있으며,이른 시일 내에 후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차기 CEO로는 전 컴팩 CEO이자 현 MCI 회장인 마이클 캐펄러스와 마이크 자피로브스키 전 모토로라 사장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피오리나가 떠난 HP는 월가로부터 본격적인 기업분할 압력을 받을 전망이다. 기관투자가들은 피오리나 재임시부터 HP가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선 HP의 돈줄인 프린터사업을 PC사업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베어스턴스의 애널리스트 앤드루 네프는 "HP가 프린터부문을 분사하면 주가는 최소한의 상승 여력을 갖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