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설날에 대한 추억은 정겹기만 하다. 부모님이 맘 먹고 장만해준 설빔으로 갈아 입고,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 설날이었다. 어른들께 묵은 세배를 올리고,잡귀를 물리친다 해서 집안 곳곳에 등불을 밝히는 일도 즐겁기만 했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말을 믿고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중에 들려오는 새벽녘 복조리 장수들의 외침 역시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가장 설레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차례를 지낸 후 어른들 앞에 나란히 서서 올리는 세배가 아닌가 싶다. 세뱃돈을 받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뿐만 아니다. 빳빳한 새 돈과 함께 건네는 덕담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하얀 백지에 써준 좋은 글귀에는 속 깊은 사랑이 담겨 있다. 사실 세뱃돈은 우리 고유 풍습이 아니다. 중국에서 유래된 풍습이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다. 중국에서는 세배는 하지 않고 훙바오(紅包)라 해서 붉은 색 봉투에 돈을 넣어 아랫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붉은 색은 행운과 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빨리 성장해서 돈을 많이 모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갖가지 문양이 그려진 봉투를 사용한다. 이웃나라에서는 반드시 봉투를 사용하는 게 관례다. 우리의 경우는 본래 세배에 대한 성의 표시로 곶감 대추 등 과일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돈을 주고 받는 것을 천한 짓으로 여긴 탓이다.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면서 널리 퍼지게 된 세뱃돈은 지금에 와서는 으레 주어야 하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몇 살까지 세뱃돈을 받는가. 현대백화점이 엊그제 조사한 내용을 보면 30대 초반까지도 여전히 세뱃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이 나이까지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어른들의 인식 때문인 듯하다. 설은 나이 한 살을 더 먹게 돼 '섧다'는 뜻이 있다고 최남선은 말했지만,뒤집으면 성숙해진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설 맞이를 하면서 세뱃돈 외에 이에 걸맞은 인생살이의 교훈 하나쯤 준비해 두면 좋을 성 싶다. 놀이문화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두고두고 그 교훈을 추억으로 새길 수 있도록 말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