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유력시되고 있는 열린우리당 이강철(李康哲) 집행위원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온 노대통령의 핵심 시니어 참모이다. 이 위원은 경북대 재학 시절인 지난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7년 6개월간복역했으며, 이후 경북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국장을 맡는 등 대구.경북 지역재야 운동권을 주도했다. 노 대통령과는 지난 87년 `양김(兩金) 단일화' 활동을 같이 하며 첫 인연을 맺었고, 90년대 초반 `꼬마민주당'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을 함께 하며 노 대통령의 `정치 동반자'가 됐다. 지난 97년 대선 때 `통추 후보' 여론이 있었을 때 노 대통령에게 출마를 권유하기도 했으며, 당시 노 대통령은 "나 보고 대통령이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위원의 정치적 입지는 지난 2002년 대선을 거치며 한층 강화됐다. 노무현 후보 조직특보 직함을 갖고 당시 민주당으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구.경북지역 선거 총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대선 승리 이후에는 노 대통령의 정무 특보 역할을 꾸준히 해왔으며, 실제로 참여정부 출범 초반에는 사실상 정무 특보로 내정됐으나, `특보정치' 논란으로 직함을갖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정치를 하려면 확실하게 하고 아니면 삼계탕 장사를 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조언에 따라 당에 잔류하면서 영남에서의 참여정부 지지세 확보에 열을 올렸다. 또한 지난해 4.15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영입추진단장 등을 맡아 외부 인사를 `징발'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등 참여정부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 역할을 함으로써`왕특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특히 총선 당시 당내 `비선(秘線) 조직'을 만들어 현직장관 징발 등 여권인사영입을 `공개적'으로 주도한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또다른 시니어 핵심 참모인 염동연(廉東淵) 의원과 달리 지난 총선 때 대구 동갑에서 낙선하는 등 88년 이후 연거푸 4차례 낙선하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적 고비 때마다 옆에 있어온 이 위원에 대해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노 대통령은 취임식 다음날인 2003년 2월26일 염동연 의원과 함께 이 위원을 따로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며 "두 분이 있었기에 오늘의내가 있었다. 결코 잊지 않겠다"고 속마음을 전하기도 했었다. 한편 이 위원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입지로 인해 이 위원이 시민사회수석을 맡게될 경우 정무적 역할 확대 등 그 기능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도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여권 관계자는 "당정관계는 기본적으로 내각과 청와대 정책실이 정책적으로 해나갈 것"이라며 "시민사회 영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업무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김범현기자 kbeom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