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외국계 기업 입사 때는 이 속담이 좀 먹히는 것 같더군요." 지난해 10월 싱가포르에 있는 영국계 케미컬선사(주로 화학제품을 실어나르는 선사)인 팬아시아마린의 십브로커(ship broker)로 입사한 서준혁씨(34). 그는 영국 카디프대 석사과정(국제운송 전공)을 끝낼 무렵인 지난해 9월 초 인터넷 채용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다. 당시 졸업논문을 준비하면서 거의 매일 2시간 정도 인터넷을 뒤지며 일자리를 찾은 결과였다. 그러나 한달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불합격이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인사 담당자에게 보름동안 날마다 10차례 이상 국제전화를 걸었다. "열심히 일할 자신있는데 왜 떨어뜨렸냐"고 따졌다. "경력이 안 돼 뽑지 않았다"며 피하던 담당자는 계속된 전화에 결국 "얼굴이나 한번 보자"며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단서도 하나 달았다. 먼저 BP코리아 물류 담당자를 만나 1차 면접을 보라는 것. BP는 팬아시아마린의 최대 고객사로 BP코리아가 아·태지역 물류중심기지로 물량의 대부분을 맡아 처리한다. "처음엔 이상하다 싶었어요. 자기들이 쓸 사람을 고객사에 먼저 보여준다는 게 이해가 안 되던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십브로커라는 자리는 선주와 화주를 연결시키는 만큼 이들 고객사와의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서울서 1차 면접을 무난히 마치고 싱가포르로 날아가 면접을 봤다. 면접은 의외로 싱거웠다. '왜 지원했나''앞으로의 꿈은 뭔가''얼마나 오랫동안 근무할 것인가' 등 질문도 평범했다. "'이 사람이 일할 각오(자세)는 돼 있나' 등 마음가짐을 가장 유심히 살피더군요. 비록 경력은 없었지만 제 열의를 높이 산 것 같았습니다. 아마 1백통 이상 국제전화를 하는 끈질김과 배짱도 한몫 했을 겁니다." 면접을 마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통지서를 받고 고용계약서에 사인을 할 정도로 일사천리로 일이 풀렸다. "월급이요? 대리급 대우를 받는데 좀 센 편이죠.무엇보다 십브로커라는 직업에 정년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영국과 미국 주주가 반씩 투자해 만든 팬아시아마린은 싱가포르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케미컬선사다. 직원은 12명으로 BP 엑슨모빌 셸 등 굵직굵직한 다국적 석유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대학입시 때 '삼수'를 해 마음고생이 많았던 서씨가 입사시험에서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끈질김과 배짱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투자와 준비를 한 결과였다. 지난 96년 늦깎이 신입생으로 한국해양대 해운경영학과에 입학한 서씨는 졸업 후 부산에 있는 중국계 해운회사에서 3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시절 1년간 미국에 어학연수 갔을 때 상사 주재원들이 일하는 모습에 반해 '언젠가는 해외에서 꼭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준비해왔다. "학부와 직장경력 등을 살리기 위해 영국 카디프대학에서 국제운송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죠. 직장생활을 해 번 돈을 유학에 모두 투자했습니다. 유학도 취업이 안 돼 떠나는 도피성보다는 목적을 갖고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대학원 졸업 당시 나이 제한에 취업난까지 겹쳐 국내 기업으로부터는 몇 번 퇴짜를 맞은 서씨는 "외국계 기업의 경우 채용 때 국내 기업보다 오히려 융통성이 많은 것 같다"며 "이젠 해외로 한번 눈을 돌려볼 때"라고 말했다. 김수찬 기자 ksc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