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몸과 정신이 하나되는 새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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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시인 >
어디 갔을까,도대체 어디 갔을까,나는 찬장 칸마다 열어본다.
벌써 한 시간째다.나는 나의 '집착'에 신경질을 부린다. 그래도 잊지 못하겠다.찬장 서랍 하나를 다시 열어본다.
역시 없다.
사방이 쪼글쪼글하게 우그러진 것,그런 걸 누가 가져갔을리도 없는데….
이사갈 때마다 그것은 없어지지도 않고 잘 따라왔다.
언제 어떻게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상당히 오래 된 것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아마도 우리 딸이 어렸을 때부터 있던 것? 아니 우리 어머니가 쓰시던 것? 아무튼 라면 같은 것 끓이기에 딱 좋은 그것.
오랜만에 놀러온 '부티'나는 동생은 "아니,아직도 이런 냄비를 쓰는 사람이 있단 말유? 버려,버려… 양은 냄비에선 인체에 해로운 쇳가루 같은 것이 나온대… 뉴스도 못봤나 봐.언니는 참,대학교수가 뭐 그래? 그런 것도 모르고…" 얘기는 대학교수 비하론으로 번졌다.
"대학교수가 뭐 그런 것도 알아야 하니? 툭 하면 대학교수 타령이야…"
동생의 카랑카랑하면서도 웃음에 가득찬 목소리가 새벽 부엌 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은근히 동의하고 있었다.
그즈음 대학에 관계된 모든 것들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교수인 나는 사실 알지 못하는 것이 많고,아니 갈수록 많고,생활에 무능하고,어떻게 보면 무능할수록 시인으로서 교수로서 괜찮은 취급을 받는 것에 은근히 길들여왔기 때문인지,갈수록 더 무능해지는 것 같고….
"언니가 그런 것도 모르는 점이 난 좋아." 동생은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그 냄비는 보이지 않는 곳 깊숙이 들어갔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가 오늘 갑자기 그것을 찾게 된 것이었다.
나 혼자 무엇인가 조금만 끓이면 되겠으므로.
나는 동생의 웃음소리가 부엌 가득히 떠돌아다니는 것을 듣는다.
그 웃음 아래에서 그녀의 '교수론'을 생각한다.
적당히 무능하고,그러나 아주 무능해서는 안 되지… 연구 프로젝트라든가 그런 것은 얼른 얼른 따와야지,어디까지나 적당히 세상일에 무능하고,그러니까 이 무능 뒤에는 '적당히 세속적이고'라는 레테르가 따라다닌다.
늘 점잖아야 하고 전문인이어야 하고….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만능인이 되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전문인을 외치면서 학생들의 선발 시험은 만능인의 시험이다.
초등학교 학생들 과외 모습을 보면 알지 않는가.
영어에서부터 논술,거기에 태권도,피아노… 아이들은 자기가 무얼 잘해야 할지 마구 혼란을 느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모차르트를 말하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요구한다.
어디에 장단을 맞출 것인가.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도 난다. 최근 윗집에서 물이 샜다.
당연히 '방수 전문가'를 불렀다.그러나 그 방수 전문가 명함에 적힌 '대표'란 직함은 아무도 쓰지않는 것이었다.
"오 사장이 말씀하시길 말예요…"하면 아무도 못알아들었다. 오 사장은 방수 전문가 오 선생의 직함이다.우리가 살고있는 이 도시야말로 정말 배관이 잘 돼야하고 하수시설과 방수시설이 잘돼 있어야 한다.그렇다면 그의 전문성은 존경받아야 한다.
전문과 만능.을유년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하나로 통일되는 해가 됐으면 좋겠다. 전문을 찬양하면서 만능인을 키우려는 교육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회에 나가면 만능을 중요시하는 것도 아니다. '시장제일주의의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면서 돈을 제일 중요시한다.
대학이라든가 공부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다. 이제까지 공부한 것 또 한번 기우뚱해야 한다. 도대체 가치의 혼란이다.
현대에 살면서 현대의 선진적인 시스템을 도입해 몸은 살면서 생각은 조선조에 살고 있는 우리.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러지 말자.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된 사회에서 살자.
새해 아침이 밝아온다.
출렁출렁 생명들이 다가오는 새해,새해는 몸과 정신이 모두 한 곳에서 살며 거기에 꽃밭 한 평씩 키우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