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 춘천 성암교회 목사ㆍ시인 >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으셨다. 사제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모에게 경배를 드렸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했고,어떤 이는 성서를 그림으로 옮겨 보여 드렸다. 성인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사제도 있었다. 그런데 줄 맨 끝에 있던 사제는 볼품 없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은 적이 없고,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더니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재주였다. 그 순간,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는 그 볼품 없는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성탄절 무렵이면 떠오르는 이 얘기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온다. 신에 대한 참된 경배는 경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보다 삶을 놀이로 즐길 줄 아는 '천진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일까. 꼭 이 얘기 때문은 아니지만,나는 며칠 전 초등학교 꼬마들이 다람쥐처럼 드나드는 문구점에서 빨강 노랑 파랑 빛깔의 초와 불꽃놀이 할 폭죽도 한 다발 사다놓았다. 아내도 이미 집안에 있던 벤자민 화분에 오색꽃등을 얼기설기 매달아 놓았고,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도 성탄절에 맞춰 내려왔다. 오늘밤에는 가족들과 촛불을 밝히고 폭죽도 뻥뻥 터뜨리며 신나게 놀 작정이다. 아기 예수의 2004번째 생일을 기리고,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아이'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서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조물주께서 기뻐할 만한 존재로 '거듭나는(新生)'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신의 놀이마당'이라고 한 이가 있지만,성탄절은 이 신의 놀이마당에 신의 아들임을 자각한 이가 성스런 배역을 맡아 참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신의 아들이 말똥 뒹구는 마구간에 강생했다는 것부터가 얼마나 멋진 해학이며 유머인가. 천진한 아이들처럼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우리도 삶을 한바탕 즐거운 놀이로 바꿀 수 있을 텐데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심각하고 우울하기만 하지 않은가. 영혼은 덧셈보다는 뺄셈에 의해 성장한다는데,오직 덧셈과 곱셈 밖에 모르는 일부 자본가들.해변의 모래성 쌓기 같은 게 권력·부·명예인데,그 덧없는 것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고 아귀다툼하는 불쌍한 어른들.그리고 놀이 중에 가장 유치한 놀이인 전쟁놀이,그것도 탐욕의 속내는 감춘 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이의 이름을 내걸고 하지 않던가. 천진한 아이들을 품에 안고 너희야말로 '낙원의 진짜 주인'이라고 일컬었던 예수는,창조적 놀이를 잃어버린 이 세대를 보고 얼마나 안쓰러워하실까. 예수는 젊음과 단절된 창조적 놀이를 잃어버린 문명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 성스런 예수의 숨결을 마시는 이들은 '나는 어제보다 더 젊다'(에크하르트)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영원한 젊음을 향유하며,우리 자신이 우주에 핀 한 송이 꽃이라는 자각을 지니고 그 영혼의 부요를 이웃과 더불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창조적 젊음을 지닌 이는,그 속에 자비의 에너지가 날마다 샘솟고,만물 속에 타오르는 신의 파릇파릇한 숨결을 느끼며,하늘을 나는 새처럼 채움과 비움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족함에서 천국이 꽃핀다는 것을 알기에 지구 표피에서 얻은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언젠가 깨어질 질그릇 같은 생에 신이 값진 보화를 담아 주셨다는 감사의 노래가 입술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창조적 젊음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의 숨결을 호흡하며 사는 우리 가족은 오늘 희망을 싹틔울 작은 빛의 축제를 준비했다. 밤하늘에 오색 폭죽을 빵빵 터뜨리면,축제의 주빈인 아기 예수도 배꼽을 움켜잡고 깔깔댈 것이고,우리 안의 '창조의 아이'도 화들짝 깨어날 것이다. 함박눈이 펑펑펑 내려주면 금상첨화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