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榮奉 < 중앙대 교수ㆍ경제학 > 말썽 많던 수도이전 사업이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애당초 손댈 필요가 없는 사업에 정권의 명운을 걸어 심각한 국민 분열과 경제불안사태를 초래했다. 당연하고도 중차대한 국가 기축(基軸)의 중요사안은 일개 정권이 전횡해 좌우할 수 없음을 헌재 판시로 보여준 것이 이번 혼란에서 그나마 얻은 소득일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향후 정부가 우선해야 할 일은 당연히 수도이전에 관련된 모든 계획과 행정을 중단하고 수습에 나서는 것이다. 용기 있는 정부라면 그동안 타당성도 가능성도 없는 사업을 고집함으로써 국가자원 낭비와 시장교란이 심각하게 발생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집권당의 선전만 믿고 따르다 좌초한 수많은 충청지역의 피해자들에게 정부의 잘못을 말하고 야당의 협조를 구해 실효적인 수습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번 헌재판결로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이를 다시 회복하는 길은 정부 여당이 진정으로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데 있다. 더 이상 경제사회가 수렁에 빠지기 전에 과거의 시행착오를 마무리할 계기를 헌법재판소가 마련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정부가 신의성실의 태도를 보일 때 이 계기는 지리멸렬하던 우리 경제·사회에 새로운 전환의 모멘텀을 제공하고 현 정권도 안정시키는 길로 연결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 정부 여당의 행적은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게 한다. 여당의 원내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훼손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분수를 망각한 헌재가 오만방자한 결정을 내렸다"고 공언하는 의원까지 나왔다. 이것은 어떤 난관,어떤 비용을 무릅쓰고라도 초지를 관철하려는 집단의 모양새다. 이런 여당이 과연 헌재판결에 승복할 것이며, 승복한다 해도 그 장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정부 여당이 의문부호와 유감을 표하며 현 상황을 임시방편하고 장래 권토중래할 대결장을 위해 칼을 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헌재 판결은 전보다 배가된 국민 분열사태의 시발점이 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 모든 상황이 향후 어떻게 귀결될지는 물론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대통령은 외국 방문길에 나서면 곧잘 "국가대표가 저인 줄 알았는데 실제는 우리 상품"이라거나, "여러 국가과제중 먹고사는 게 첫째"란 말을 터뜨려 국민을 놀라게 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니 재계 인사를 동반해 외국을 돌아볼 때의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믿는지도 모르겠다. 이 때의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우리의 대통령'이다. 그러나 진보혁신의 땅에 돌아온 대통령에게서 이런 말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사람은 거처(居處)에 따라 기상(氣象)이 변하고,먹고 입는 것에 따라 몸이 달라진다고 한다. 현재 대통령의 주위에 포진해 혁신을 주도하는 세력은 80년대 독재타도에 나선 386세대 운동권들이다.이들은 선동과 선전기술에 능하고 혁신사회의 성취가 절대적 명제이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선 어떤 수단동원도 타당함을 배워왔다. 자기를 희생해 숭고한 사회운동을 한 사람들이지만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지는 못했다. 학생운동 지도자 시절 이들은 실용적 과목을 제대로 이수한 적이 없다. 전국시대 제(齊)왕이 그림 잘 그리는 손님을 맞아 "어떤 것이 그리기 가장 어려운가"를 묻자 객이 대답했다. "귀신을 그리기가 가장 쉽습니다. 개나 말 따위 누구나 조석으로 보는 짐승은 꼭 그대로 그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형체를 볼 수 없는 귀신은 아무렇게나 그려도 되니 아주 쉽습니다." 젊은이들을 경험하지 못한 과거로 이끌고 가 조상을 재단하고, 알 수 없는 미래의 혁신세계를 그려주는 것은 난해한 말로 가능하고 책임도 따르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주는 일은 현실이며 정치꾼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오늘날 친노·반노 집단간의 분열과 대결상황은 극에 이르러 국가경제와 사회의 기(氣)가 탈진되고 있음에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분열과 추상의 길은 쉽고 안정과 현실로 가는 길은 어렵다. 향후 어떤 길이 우리 앞에 열리든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수행한 정도(正道)의 역할에는 우렁찬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