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의 산실임을 자부해 온 서울대학교가 흔들리고 있다. 이공계 학생들은 '돈벌이가 좋은' 의사나 한의사가 되기위해 무더기로 학교를 떠나고 있고 인문.사회계는 '출세가 보장되는' 고시에 매달리면서 기초과학등 당장 돈벌이가 시원찮은 '비인기' 학과는 고사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취업대란속에서 서울대학 졸업생의 취업률도 평균 50% 아래로 급락하면서 이같은 경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철학 물리학등 취업비인기 학과들의 경우 '기초학문의 메카'라는 자부심은 간 곳이 없고 신입생 미달사태를 우려할 정도로 위기감이 팽배해 지고 있다. 최근엔 특출한 이공계생들이 학부 1~2년만 마치고 미국 등지로 나가는 경향이 확산되고 본교 대학원 진학생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대학원 중심 대학 육성'은 슬로건에 머물고 있다. 대학 안팎에선 '서울대의 위기는 국가 장래를 짊어질 엘리트 육성의 위험신호인 동시에 장기적으론 국가경쟁력 추락으로 이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서울대의 국제경쟁력은 전세계 대학 중 1백50위권 정도(중국 상하이 자오퉁대 조사)라는 혹평이 나올 정도로 저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대의 절박함은 대학 내부에서부터 터져나오고 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지난 14일 58주년 개교기념식에서 "지금 서울대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서울대의 위상과 심지어 존재 의의에 대한 회의마저 일고 있습니다"라고 비장하게 토로한 바 있다. ◆'의대''한의대' 입학 위해 이공계생 매년 수백명씩 '자퇴'=18일 서울대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2학년도에 1백92명,2003학년도에 2백75명의 학생이 '자퇴'를 선택했고 올해에는 지난 1학기까지 모두 3백7명이 자퇴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지방대라도 상관없이 의·치대나 한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대를 떠나는 학생들이 급증하고 있다"면서 "자퇴생 3명 중 2명이 이공계생"이라고 전했다. 지난 3년간 자퇴 학생 7백74명 가운데 △공과대 2백53명 △농업생명과학대 1백46명 △자연대 1백1명 등 이공계 출신이 5백50명(64.5%)에 달했다. 공대의 경우 △2002년 45명 △2003년 98명 △2004년 1백10명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이날 서울대 국정감사에서 박창달 한나라당 의원은 "전세계가 이공계 우수인력 확보에 총력전을 펴고 있는 상황에서 기초학문에 매진할 것으로 기대돼 온 서울대의 우수 학생들이 의대로 빠져나가는 것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고시 도전을 위한 '법대 전과붐'=이공계생들이 '돈벌이가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줄줄이 서울대를 떠나는 한편 남은 학생들은 인문.사회계는 물론 자연대 공대생까지 '고시'에 매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대의 전과 인기 1위는 단연 법학부. 매년 41명~50명의 학생이 법학부로 전과하고 있다. 전공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취업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2004학년도 과별 순수취업률을 보면 의학과 졸업자의 96.9%,치의학과는 93.1%가 취업한 반면 자연과학부, 철학과는 한 명도 취직하지 못했다. 군 입대자와 대학원 진학자 등을 뺀 서울대 전체의 순수취업률은 45.1%로 전국 평균 56.4%에 크게 못 미쳤고 서울대 92개 학과(부) 중 54개 학과(부)의 순수취업률은 50%도 안 됐다. ◆나라 안팎에서 떨어지는 경쟁력=우수 이공계생들이 의대나 법대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서울대 공대등이 글로벌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물론 포항공대 등에도 밀린다는 조사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물리학과의 경우 우수한 학생이 많이 줄었고 그나마 우수한 학생은 학부과정중에 미국 학교로 유학가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이라며 "예전엔 미국 대학들과 같은 눈높이로 가르쳐도 따라왔는데 우수학생 이탈이 심해지면서 눈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 당국은 과거 과학논문인용색인(SCI)을 들어 국제경쟁력이 상위권 (국제 SCI 평가 35위)이라고 하지만 앞으로 이런 수준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참여정부의 지역균형정책으로 위기감 증폭=의과대학 기초의학 분야의 한 교수는 "참여정부 집권 후 지방균형발전차원에서 '수도권대학은 제외' 시키는 연구비 지원사업이 증가해 서울대는 연구비가 크게 줄었다"며 "국가 균형발전도 좋지만 서울대의 기초과학분야 연구력은 크게 저하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의 상하이자오퉁대학이 자연과학연구논문 성과 고급연구원 확보율 과학논문인용색인 등을 따져 전세계 5백위권 대학의 순위를 매긴 결과 서울대는 1백53~2백1위권으로 평가됐다. 이에 대해 서울대는 '2003년 SCI 논문 실적 세계 35위'를 내세운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절대 논문수는 단연 국내 1위였으나 교수 1인당 논문 수는 광주과학기술원이 5.46편으로 1위였고 서울대는 포항공대(4.32편) KAIST(3.2편)에도 밀리는 2.96편에 그치는 등 국내에서도 수세에 몰려있다. ◆'순혈주의'가 큰 걸림돌=이 와중에도 서울대 내의 이기주의는 개혁을 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라는게 안팍의 공통된 시각이다. 2002년 정운찬 총장 취임 이후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2004학년도 3천8백85명에서 2005학년도 3천명으로 감축하려는 계획에 경영대 등 단과대학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입학 인원은 3천2백60명 규모로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본교 출신의 교수 임용 등 학문의 다양한 발전을 막는 '순혈주의'도 계속되고 있다. 18일 서울대가 열린우리당 구논회 의원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1년 이후 교수 4백9명을 임용했으나 이 중 다른 학교에서 학부를 나온 교수는 67명(16.3%)에 그쳤다. 이에 따라 올해 전체 서울대 교수 중 서울대 출신 비율은 92.6%에 달하고 있다. 구 의원은 "미국 등은 학문의 다양성 확보와 교류를 위해 본교출신 임용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며 "본교출신 비율이 높으면 학문적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되고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학문 연구자들은 소신있는 연구를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