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시는 절친한 친구 사이임이 틀림없다. 계절을 노래한 시 가운데 가을을 읊은 게 가장 많다고 한다. 평소 신문이나 잡지 한 모퉁이에 실려 있는 '오늘의 시' 한 편을 제대로 음미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 퇴근길에 가끔 들리는 광화문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서 조락하는 잎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새삼 인생의 보람과 회한이 교차되면서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이 가을에 가을 사람들아,흐르는 물 위에다가나 바람 위에다가나,성 한번 쓰고 기침 한번 하고,이름 첫 자 한번 쓰고 기침 한번 하고,이름 끝 자 한번 쓰고 기침 한번 하고,우리들 모가지 단풍물 들거든,우리 목소리 단풍불 붙거든,곱게 이름 한번 부르자,이 가을에 가을 사람들아.' 평소 잊고 있던 이름을 한번 불러 보자던 조태일 시인의 시 '이 가을에 가을 사람들아'를 애송해 온 지도 벌써 35년이 지났다. 그 때 홍릉 입구에서 자취하던 조 태일 시인의 이층 집 근처에 내가 같은 대학 신입생으로 하숙하면서 만났다. 첫 시집 '아침 선박'이 출간되던 해였다. 조태일 시인과의 교류를 통해 저항의 가치관을 배우게 됐으며,나는 그 이듬해에 민주화를 주장하는 필화사건으로 퇴학 당하고 부산으로 낙향했다. 그 때 조태일 시인이 내게 준 육필 시가 바로 '이 가을에 가을 사람들아'였다. 1999년 가을,시인은 곡성 태안사의 부처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바위처럼 침묵할 줄 알며,눈(雪)처럼 냉정하고,불처럼 뜨거운 사람이었지만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공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민주화 시대가 왔다 해도 권력에 대한 비판에 소홀한 적도 없었다. 조태일 시인을 두고 민중의 시인이라고 일컫고 있지만 그는 국토의 시인이었다. 그의 연작시 '국토'에서 '못생긴 얼굴끼리인데,니 얼굴 내 얼굴 가려 무엇하랴,니 목소리 내 목소리 가려 무엇하랴'고 호소했다. 예나 지금이나 못생긴 사람들의 다툼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니 소시민들에겐 가을은 없고 겨울만이 있는 셈이다. 정치인들은 시를 잘 읽지 않아 감성이 부족하고 민생의 어려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는 김춘수의 '꽃'이라고 하는데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시는 무엇일까. 정치인들도 한번쯤 서점에 들러 조태일 시인의 시집 '국토'를 보고 나라사랑과 국민사랑을 다시 생각하면서 국감에 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