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연구성과' 서말이라도 잘 꿰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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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춘 영남대 객원교수 >
공장에서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는데 예전엔 3년씩 걸렸다.
사업이 단계적으로 시행됐기 때문이다.
고객선호도 조사-개념설계-설계-제작-조립-시험-평가 등이다.
요즈음엔 기간이 반으로 줄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짧은 기간에 과제를 마치기 위해서는 관련부서가 동시에 사업을 시작하고 서로 긴밀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전산설계부분에서 보낸 작업협조문을 기계조립부분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계측제어부분의 협조문을 외장부분에서 알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어려움은 6시그마와 같은 품질활동이나 지식경영과 같은 경영활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IT(정보기술)업계는 사용설명서인 매뉴얼을 특히 많이 쓴다.
기술 진보가 빨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소개되다보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이 매뉴얼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벤처회사가 소프트웨어(SW)를 개발하면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그 때 제출하는 사용설명서의 내용을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가 없어서 거절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회사는 기술이 문제가 아니고 글쓰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IT업계는 글을 제법 쓸 줄 아는 직원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한다.
병원도 예외가 아니다.
예전에는 기술이 명의를 만들었다.
많이 알고 솜씨 좋은 의사가 명의였다.
그런데 요즈음은 의학전문지식도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다.
솜씨도 의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레이저와 로봇으로 대체됐다.
그러므로 현대의 명의는 '진료보다 설명 잘하는 의사'이다.
실제 이러한 모토는 국내의 한 대형병원이 올해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전문 작가에게도 어려운 작업이다.
마치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니 글쓰기 교육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글쓰기에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공계 출신 기술자나 과학자는 더하다.
해답은 없는 것인가?
글쓰기 방법을 바꾸면 해답은 있다.
문학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사무적인 글쓰기를 하면 된다.
글은 아름다워야 하고, 읽는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글쓰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문학적인 글은 잘 그린 그림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러나 그림 대신 약도를 그린다면 약도는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
기술자는 글쓰기를 약도 그리 듯이 하면 된다. 즉 '주요 사실을 알기 쉽고 간결하게' 기술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술글쓰기(Technical Writing)의 핵심이며,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기술자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기술글쓰기는 미국에서 출발한 개념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글쓰기'이다.
50년의 전통을 가지고 공대에서 '공학교육인증제'(산업계가 만족하는 공대교육 프로그램)의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회사에서 간부로 승진하면 반드시 다시 배우는 분야이다.
기술글쓰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이공계가 6시간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글쓰기의 두려움을 없애고 제법 훌륭한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산업경쟁력을 뒷받침하는 기술글쓰기의 빠른 확산을 위해 다음 사항을 제안한다.
기술글쓰기 전문가(Technical Writer)를 육성하자.
첫째,대학은 기술글쓰기 센터를 만들자. 여기서 '공학교육인증제'를 채택한 공과대학에서 기술글쓰기를 가르칠 교안을 개발하고 전담교수를 양성한다.
둘째,기업은 산업 현장에서 근무하는 기술자에게 기술글쓰기 교육을 시키자.독자적으로 교육 기회를 마련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관련 협회가 이를 제공하도록 하자.
셋째,정부는 테크니컬 라이팅 기술자격제도를 만들자. 일본은 테크니컬 커뮤니케이션(Technical Communication) 기술검정제도를 1996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테크니컬 라이팅 2급·3급 자격을 발행하고 있다.
넷째, 테크니컬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가진 회원은 협회를 창립하자.우리나라에서 생소한 이러한 분야를 제대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관련 단체의 창립이 시급하다.
/전 청와대 과학기술 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