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바베트의 만찬과 축제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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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이 < 문학평론가 >
추석연휴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귀향행렬로 꽉 찬 도로에서 운전에 시달리느라,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하느라 팔다리가 쑤시고 결린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머리까지 멍하다.
다시 도시의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이 후유증은 행복한 후유증이기도 하다.
귓가에는 여전히 조카들의 웃음소리와 친지들의 정담이 들려오고 입안에는 찰진 햅쌀밥과 고소한 부침과 솔잎향의 송편 맛이 감돌고 있다.
고향집을 떠날 때 몰래 눈가를 붉히며 바리바리 먹을 것을 싸주시던 부모님의 마음도 두 손 안에 박힌 듯이 남아 있다.
생각해보건대 오늘날 명절은 전통 문화의 계승이란 대명제의 차원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명절은 이제 도시의 숨막히는 일상의 반대편에 서 있는,넉넉하고 아름다운 축제가 됐다.
이 축제는 따뜻한 정(情)의 축제이며 가슴 설레는 귀향의 축제이다.
나눌 것이 있어 뿌듯하고 돌아갈 곳이 있어 행복한 이 시간은 도시의 화려한 이벤트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축제'에 속한다.
명절이면 감행되는 민족 대이동의 진풍경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 마음의 끝에서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과 들판을 만난다.
뿐만이 아니다.
한참 동안 잊고 지낸 조상들과도 편안하게 조우한다.
특히 추석에는 고향에서 수확한 햇곡식과 햇과일을 조상께 바치고 이웃과 나누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풍성한 축제를 펼친다.
여기에는 삶과 죽음,과거와 현재,나와 남 사이의 날카로운 경계가 없다.
이 행복한 축제의 기간에 사람들은 도시를 미련 없이 떠난다.
동시에 사람들은 도시의 미덕인 속도와 효율성도 버린다.
차가 아무리 막혀도 아무도 진심으로 불평하지 않는다.
편리한 도시를 떠나 옹색한 시골집에서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어도 헛된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축제의 진수의 하나는 훌륭한 음식이다.
긴 시간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차린 추석 차례상은 패스트푸드에 찌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선사한다.
추석 내내 그 음식들을 먹으며 아이작 드네센의 소설을 각색한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떠올렸다.
이 영화는 오직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마음을 다해 만든 음식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가 그것이다.
추석(秋夕)! 가을 저녁의 명절에 온 식구가 함께 모여 먹는 만찬에는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다.
그 뒤로 후광처럼 보름달이 비쳐주었다.
그러나 축제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또한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축제의 변두리에는 늘 소외된 사람들과 공간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추석에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할아버님의 산소로 가는 길이 없어진 것이다.
산소는 강원도 깊은 산 속,고랭지 배추를 재배하는 작은 마을 뒤에 있었다.
그런데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떠나면서 수풀에 뒤덮여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년에는 할아버님 산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배추농사를 짓던 그 사람들은 올 추석을 어디에서 쇠었을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충청도에 있는 고향에 도착한 날 밤, 기차역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몸집이 초등학생만한,칠순이 넘으신 할머니는 배낭을 힘겹게 메고 계셨다. 직접 기른 고추를 빻아 울산에 있는 아들에게 주러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울산까지는 밤을 꼬박 새워 가야 하는 거리였다.
할머니의 배낭에 든 고춧가루는 바베트의 만찬에도,여느 차례상에도 손색없는 것이었지만 그 정성을 울산의 아들이 깊이 헤아려줄지는 의문이었다.
괜스레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추석 명절이 모두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소외된 곳을 돌아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혹시 그곳에 내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기에 더욱 그러하다.
'바베트의 만찬' 현장에서 '축제의 그늘'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내년에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명절 후유증'을 앓게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