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시급한 국책사업이나 정책 결정은 뒤로 한 채 불요불급한 정치성 정책 추진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원전수거물관리센터(원전센터) 부지선정이나 새만금 간척사업,공기업 민영화 등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안은 이익집단의 반발 때문에 기한 없이 표류되는 상황에서 행정수도 이전이나 공정거래법 개정 등 정작 토론과 공론화 등이 절실한 과제는 여론을 무시한 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 결과 불필요한 마찰과 국론분열만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뒤로 밀리는 과제들 대표적인 사례가 19년을 끌어온 원전센터 부지 선정.지난 15일 마감한 지방자치단체 예비신청에 단 한 곳도 신청을 안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부·여당은 시민단체 등과 다시 공론화에 나서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지만 반대여론을 설득할 대안이 없어 최장기 미제(未濟) 국책사업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당장 4년 뒤면 국내 방사성 폐기물은 포화상태에 도달하는 상황이다. 서둘러 원전센터를 짓지 않으면 총 발전용량의 40%를 차지하는 원전의 일부가 가동을 멈추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다급한 국정과제지만 정부는 고심만 거듭하고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도 마찬가지다. 지난 91년 착공된 새만금 간척사업은 환경단체에 휘둘려 13년째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환경단체의 사업중지 가처분 소송 승소로 7개월간 사업이 중단됐다가 올 1월 항고심에서 재판결과가 뒤집혀 사업이 재개됐다. 그러나 환경단체가 제기한 사업 취소청구 본안소송이 아직도 진행 중이어서 찬반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가 출범 직후 "사업은 추진하되 용도 등은 종합적으로 재검토한다"는 모호한 방침을 내놓아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지적이다. 공기업 민영화도 '갈팡질팡'이다. 지난 6월 대통령 직속 노사정위원회가 한전의 배전부문 분할 중단을 권고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5년간 끌어 왔던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한전 노조의 격렬한 반대와 작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의 재검토 요구로 배전 분할 방침이 무기 연기됐다가 결국 무산되고 만 것.노조 반대와 여기에 끌려 다닌 정부의 합작으로 공기업 민영화가 벽에 부닥친 꼴이다. 영화업계의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 상영일수) 축소 반대에 정부가 좌고우면하면서 6년째 끌어온 한·미투자협정이 아직도 결실을 못 보고 있는 것도 비슷한 사례다. ◆밀어붙이는 정책들 신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수십차례의 공청회와 설명회를 통해 여론을 수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전히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고,야당인 한나라당도 강행 추진에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 수렴은 이제 됐다'며 무조건 밀어붙이는 정부 여당의 행태에 고개를 가로젓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최근 여야간 극한 대치를 불러 일으켰던 공정거래법 개정도 마찬가지.출자총액제한 유지,계좌추적권 부활,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 등을 뼈대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야당과 재계는 "그렇지 않아도 냉각된 투자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며 완화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후퇴없는 재벌개혁'을 명분으로 국회 강행 처리를 추진하고 있다. 여당은 기업과 야당의 공개토론회 제안도 한동안 무시했다. 국회 상임위 파행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나서야 여야가 법안 처리를 11월로 미루기로 합의하긴 했으나 장기불황이 우려되는 지금 출자총액 규제 등이 그렇게 중대한 사안인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부동산 보유세 강화 방안도 시장 상황에 비춰 너무 강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주택 재산세의 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금액) 인상과 종합부동산 세제 도입 등은 시장여건을 봐가며 완급조절을 해야 할 사안이지만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 시장을 무시한 채 과세형평과 소득재분배 등 명분에만 매달리는 정부의 강박증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밖에도 국가보안법 폐지나 과거사진상규명법 제정 등도 야당과 일부 국민의 반대와 무관하게 가속을 더하는 사안들이다. ◆포퓰리즘 버려야 나성린 한양대 교수는 "현 정부가 분배정책 과거청산 등은 무리하게 강행하는 반면 시민단체나 노조 등이 반대하는 국책사업은 일단 미루고 보는 것은 대중영합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도 "성공하는 국가와 실패하는 나라의 차이는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 필요할 때 제대로 하느냐 여부"라며 "토론과 참여라는 이름을 내세워 중요 국책사업 결정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김영봉 중앙대 교수는 "정치적 목적이나 이해보다는 진정한 국가이익을 생각해 국정 우선순위를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차병석·이정호 기자 chabs@hankyung.com